4장 : 허영이 사라진 자리에 재능이 반짝인다 _ 2화
화들짝 깨어나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10시. 이런 젠장! 지각이다. 이불을 제치고 벌떡 일어나다 멈칫한다. 그리곤 이내 다시 깊은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간다.
‘아 맞다! 나 회사에서 잘렸지….’
오랜 세월 일용직 노동자처럼 살아온 나에게 아침에 일어나 가야할 곳이 없고, 그 어느 것도 신경 쓸게 없어진 삶은 나를 급격히 초조하게 만들었다. 내면에 깃들어 있던 불안이 슬금슬금 표면으로 기어 나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무렵 시작된 치통과 두통은 하루에도 진통제를 수 알씩 삼켜야 피할 수 있었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 앞은 흐릿하고, 잇몸은 부어 오르고, 조금 간지럽다 싶으면 온몸이 얼룩소 마냥 붉게 얼룩지며, 설사는 두 달째 이어지고 있었고, 온몸의 떨림이 손가락 끝까지 사시나무 떨듯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했던 것은 귀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의 뇌 속에 들려오는 소리였다. ‘칙 칙 칙’ 처음엔 증기 기관차 소리 같지만 계속 듣다 보면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가려고 열심인 우주선의 궤도 수정 때 나는 소리와 똑같다.(사실 우주에서는 소리가 없지만) 마치 나의 뇌가 제자리를 찾고 싶어 궤도 수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뇌야! 어디로 가려고 그러는 거니?’
치통을 치료하던 치과에서는 나의 통증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소리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이미 세개의 치아를 신경치료 하였으니 그 부위가 계속 아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뿐더러, 병변이 확실하지 않은 치아의 신경을 제거 할 수는 없다는 소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통증을 호소하던 나에게 치과에서는 더 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며 조심스레 조언을 했다.
“환자분! 제 말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간혹 우울증이 있는 분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기도 하고, 건강한 사람들보다 통증을 더 민감하게 느낀다고 합니다. 연구결과도 나와 있어요. 그러니…, 정신과를 한번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나는 이미 신경정신과에서 ‘꾀병’ 진단을 받은 전적이 있다. 아무래도 꾀병은 아닌가 보다. 다시 한번 신경정신과의 문을 두드린다. 나의 끔찍한 통증과 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상담 의자에 앉자마자 쏟아내지만 나직한 목소리의 여의사 선생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반응이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제 몸 안에 암세포가 생긴 것 같아요. 뇌에 있는 것 같아요. 그 것이 나를 서서히 침식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아, 그러셨군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나는 너무 아픈데 치과에서는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무래도 다른 곳에 원인이 있는데 그게 뇌인 거 같아요. 왜냐하면 뇌에서 계속 이상한 소리도 들리거든요.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워요. 감당 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오면 어쩌죠?”
어떠한 이야기에도 평정을 잃지 않던 정신과 선생님은 그제서야 나를 환자로 대하기 시작했다. 지금 다니는 병원을 믿을 수 없다면, 걱정만 키우지 말고 더 큰 병원에서 검사를 진행해 보기를 권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차트에는 ‘건강 염려증’이라는 단어만 추가 되었을 뿐이었다.
종합검진 예약을 잡고 최대한 빠른 날을 받아 검사를 진행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린 이주일 후 나온 검사 결과는 우려가 무색하게도 ‘매우 건강함’이었다. 믿을 수가 없다. 아니 수백만원짜리 검사가 원인도 못 찾다니. 다른 병원으로 간다. 이번에 나의 시끄러운 뇌를 검사하기로 했다. 청력 검사를 하고, 뇌 CT를 찍었다. 일주일 후 결과를 들으러 병원으로 가면서 드는 생각은 ‘또 건강하다고 하겠지. 그럼 다음엔 어디를 검사 해야할까?’였다. 진단 결과를 들으러 S 병원의 이비인후과 진찰실로 들어갔다. 조그만 안경을 코에 걸친 통통한 의사가 기름진 머리를 한 채 모니터만 바라보며 나에게 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무덤덤한 말투에는 그 어떤 긴장도 느껴지지 않았다.
“음…. 네. 왼쪽 귀 속에 종양이 있네요. 일종의 신경종 입니다. 조직검사는 못해요. 귀를 열어야 하거든요. 그러면 청력을 상실합니다. 얻는 것보다 잃는게 더 크죠. 이거 그냥 달고 사는 사람들 많아요. 더 커지지만 않으면 크게 상관 없어요. ”
방심하다 놀란 나의 뇌에서는 또 칙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미쳤나 보구나. 이제 저런 헛소리까지 들리다니…. 나의 의심스러운 되물음에 의사는 확인도장을 다시 찍어준다. 내 병의 정식 명칭은 ‘청신경초종’이었다. 흔한 질병은 아니다. 청신경에 붙은 뇌종양의 일종으로 청력 상실, 두통, 어지럼, 얼굴 동통, 귀울림등이 수반되는 병이었다. 크기가 커질수록 청각과 안면 신경을 눌러버려서 제 기능을 상실하게 하는 병이다. 다행이 초기에 발견해서 크기는 아직 작다. 하지만 없앨 방법도 없다.
검사 결과를 알리려 다시 찾아간 신경정신과 선생님에게 난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그렇게 떠들 일인가 싶은 생각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야 들었다.
“선생님! 제 뇌에 진짜 종양이 있었어요. 사실 불안해서 검사를 한 것일 뿐인데, 건강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수그러들었었는데. 그런데 진짜 종양이 자라고 있었어요. 악성인지 아닌지는 6개월 후에 다시 검사해 봐야 알 수 있대요. 선생님! 전 미치지 않았나 봐요. 이 모든 것이 진짜였어요.”
“아. 네. 그러셨군요. 진짜였네요”
정신과 선생님의 차트엔 이제 ‘건강염려증’ 옆에 ‘청신경초종 진단’이 추가 되었다. 내가 정신병 환자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으나,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는 최대량으로 처방 되었다. 얼굴이 아플 때에는 안정제와 진통제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허망했다. 나는 이제 한쪽 얼굴이 마비된 채, 약으로 연명하는 고통스럽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나의 삶은 고통만 남은 시간인가? 하지만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신기하게도 불안과 초조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젠 더 확장할 곳이 없는 자포자기가 주는 안도감인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정신은 서서히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두 해가 지난 지금. 이제 나의 뇌는 궤도수정을 멈추었다. 여전히 진통제를 비타민처럼 복용하고 있지만, 나의 뇌는 제자리를 찾은 듯하다. 6개월 마다 받았던 검사에서 종양의 크기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그 조그만 종양은 더 이상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을 잃고 불안에 떨던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찾으라고 신이 보낸 일종의 신호였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 파멸같이 느껴지던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새로운 기회를 찾고 마음껏 도전하고 즐길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내 삶에 필요한 마땅한 것들을 천천히 캐내는 일을 시작하였다. 나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귓속 종양과 함께 말이다. 그러니 서둘지 말아라! 나의 종양아! 나의 인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