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진 Oct 31. 2020

고독한 것에는 이름이 없다

4장 : 허영이 사라진 자리에 재능이 반짝인다 _ 4화

바지락은 한때 그 수가 너무 많아 갯벌에서 발에 밟힐 때마다,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바지락 바지락’ 하여, 바지락이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혼자 있었다면 폭신한 갯벌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을 그 조개는 다른 조개들과 함께 있어서 이름을 갖게 되었다. 물론 조개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던 그 이름 따위에는 관심이 없을 터이지만….


이름 지어지는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생김새가 그러하여, 냄새가 그러하여, 쓸모가 그러하여, 소리가 그러하여 등등…. 이유는 가지가지다. 사람만이 단지 태어남으로 이름을 얻는다. 하지만 이름과 다르게 자라 버리면 어쩌지? 다 자라서 완성되어졌을 때 이름이 지어졌다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름 지어졌다. ‘이수진’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1. 생김새 : 작고 아담한 크기나 탄탄한 살 성을 가지고 있어 다부져 보인다. 반들거리고 반듯한 이마는 약간 건방져 보이는 콧날과 이어져 있으며 (엄마가 언제나 최고 작품이라 말하는), 입꼬리가 살짝 쳐져 억울해 보이는 입 모양은 어쩐지 슬프다. 쌍꺼풀이 없는 또렷한 눈매는 무엇이든 도발적으로 빤히 바라보기를 잘하는 반면, 짙은 눈썹은 언젠가부터 항상 화가 나 있는 듯이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사랑에 빠질 때면 언제나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

2. 소리 : 여러 가지 소리를 내지만, 저음의 목소리가 여자 치고는 꽤 안정적이고 설득력 있는 톤이어서, 의외로 광고주를 설득하는 광고 프레젠테이션 때 잘 먹힌다. 진정성 느껴지는 목소리에 가끔씩 말을 더듬을 때도 있어서 그것이 되려 고집도 세어 보이게 하여 믿음을 형성한다. 음치이므로 노래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소리 내어 울 때는 우아하지 못하다. 눈물보다 콧물이 먼저 나와 흘러나오는 코를 들여 마시느라 안쓰럽고 꼴이 좋지 않다.  

3. 색깔 : 어두운 누런 빛의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해를 잘 받는 여름이면, 보기에 아주 아름다운 브론즈 컬러로 변한다. 마치 코팅을 한 것처럼 반들반들 윤이 나기도 한다.

4. 쓰임새 : 4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디자인 전공자로서 패션 광고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만 20년 경력으로 돈을 버는 경제의 주체이다. 그 외에는 큰 쓰임새가 없다.

5. 강점 : 엉덩이가 가벼워 부끄러움을 잘 모른다. 

6. 약점 : 내가 원하는 것만 기억하려는 습성이 심하다. 변덕이 심하다. 고통은 무엇이든 질색한다. 겁이 많다.


이렇게 요약해 놓으니…, ‘이수진’이란 어떠한지 아시겠는가? 미안하지만 알 턱이 없다. 이름을 안다고 알 수 있는 것은 글자 3개뿐이다. 나에 대해 요약을 해 놓은 들, 그것이 다른 이들과 얽히고설키는 관계에서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누군가는 나를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위선자’라고 부르며, 또 다른 이들은 ‘마음이 너무 여려 상처를 잘 받는다’ 고도 말한다. 우리가 마주치는 위치와 상황과 선택이 모든 관계에 작용하다. 그 작용과 반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이름의 자격이요. 진짜 이름이다. 바지락 거리는 이 세상에서 나만 아무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면, 어쩌면 나는 이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고독은 반대말이 없다. 공기처럼 늘 확실히 존재하는 것에는 반대말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다. 고독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고독이 습관처럼 익숙해진 사람은 그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고독은 다른 삶을 꿈꾸기 시작하면서 그 모습을 바꾼다.  당신은 나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서로 이름을 불러주는 사이가 되기 전에는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를 알맞게 부를 수 있는 너만이 내 이름을 불러주길 바란다. 고독한 조개가 되지 않도록….

이전 25화 허무와 혐오 사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