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 허영이 사라진 자리에 재능이 반짝인다 _ 5화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동공, 내 귀속과 다른 외부의 압력이 나의 신경을 눌러 버리는 이 어지럼증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날이라는 뜻이다. 젠장 오늘은 내 생일이다.
선릉에 있는 정신과의 문턱을 3주에 한 번씩 넘어야 한다. 안정제와 수면제를 받기 위해서다. 복잡한 선릉역 사거리의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있다. 선릉은 강남지역의 번화가 치고는 비둘기가 유난히 많은 동네 중 하나다. 발 밑에 비둘기들이 삼삼오오 진을 치고 연신 바닥을 쪼아 댄다. 유독 떨어져 있는 비둘기가 한 마리 눈에 보인다. 고독한 비둘기를 자세히 살펴보니 한쪽 발이 없다. 아마도 경솔한 자동차에 짖눌려 다리를 잃었을 것이다. 한 발이 없는 비둘기는 나머지 한 발로 온몸을 지탱하고 가만히 서있다. 연신 구구 거리며 돌아다니는 다른 비둘기들과 달리 서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모양새다.
야생의 세계는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 적자생존. 그러다가 나는 머리를 들어 공중에 길게 늘어선 전선 위에 앉아있는 비둘기들을 보았다. 그렇구나! 발이 두 개구나. 발이 두 개가 있어야만 전선 위에 올라가 균형을 잡으며 평화로이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날아다니는 비둘기의 발도 두 개 여야만 한다. 한 개의 다리로는 균형을 잡지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특권도 누리지 못한다. 하염없이 바닥에만 있어야 한다. 한 다리의 설움이다.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횡단보도에 줄지어 서있는 두 다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흰 고래에게 다리 하나를 잃은 <모비딕>의 에이헤브 선장은 고래의 턱뼈로 만든 의족을 잃어버린 다리를 대신해 그 자리에 끼우고,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흰 고래를 찾아 복수를 하기 위해 세계를 항해한다. 한 다리의 집착이다. 한 다리를 잃음으로써 에이헤브 선장은 단테의 첫 번째 지옥인 림보 limbo에 빠진 듯하지만, ‘희망 없는 열망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만은 피해야만 했기에 그는 흰 고래에게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그 고래를 찾아 복수를 해야 하는 희망이 있는 삶을 택했다. 하지만 정작 흰 고래는 에이헤브 선장의 다리를 없애버린 일도, 에이해브 자체에 관심도 없고, 존재도 알지 못한다. 고래의 무관심은 곧 우주의 무관심이다. 멜빌의 우주에는 신도 없고, 숨겨진 진리도 없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의미의 허무. 그것은 그를 아니 우리 모두를 미쳐가게 하는 위험한 생각이다.
나의 왼쪽 엉덩이에 통증이 생겼다. 마치 오른쪽 다리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해 왼쪽 엉덩이가 모든 움직임을 관장하듯이 왼쪽 엉덩이의 한 근육만 피곤하다. 앉는 것도 고통이오. 걷는 것도 고통이오. 누워있는 것도 고통이다. 이것은 디스크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그것은 겪어봐서 알고 있다. 이것은 ‘이상 증후군’이다. 이름도 이상하지. 나는 선릉의 비둘기 또는 에이헤브 선장처럼 곧 한 다리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진짜 아픈 것은 왼쪽 엉덩이가 아니라 균형을 잡지 못하는 마음 한 조각일까?
양 쪽 다리가 모두 제 기능을 해야만 높고 평화로운 곳에 올라 눈을 내리깔고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다. 그러나 한쪽 다리만 있어야 악마적이고도 순수한 광적인 집착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광활한 우주에서 어떠한 의미도 희망도 티끌 하나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무의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작가적 정신’이라 규정해 본다.
허영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야 나는 한 다리로 설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한 다리로도 두 다리처럼 단단히 설 수 있는 희망 연습일지도 모른다. ‘치열한 작가 정신’ 그 ‘열망’ 이라도 붙들고 나는 제대로 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