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초년생이던 어느 주말, 우연히 아트페어 표를 얻게 되어 무료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형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아트페어는 국내외 화랑들이 모여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자리였다. 미술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공짜 표를 버리기 아까워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다.
‘미술품은 부유층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현장은 편안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작품들이 시장의 물건처럼 사고 팔리는 모습이 신기했고 부동산처럼 크기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것도 흥미로웠다. ‘아파트 평당 얼마’ 대신 ‘호당 얼마’라는 식이었다. 1호는 엽서 한 장 정도 크기인데, 만약 어떤 작가의 작품 가격이 1호당 10만 원이면 10호짜리 작품은 100만 원이 되는 식이다. 알고 나니 아트페어 곳곳에서 ‘이 작가님은 호당 얼마고…’ 하는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사전 지식이 전혀 없던 나는 이 그림은 얼마쯤 할지 혼자 맞춰보며 구경했다. 그러다 한 작가의 그림이 강렬하게 꽂혀 한참이나 그 앞에 서 있었다.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화풍이 매력적이었다.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페이스북에 추가했다. 그렇게 SNS로 작가의 신작들을 보던 어느 날, 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 그림은 반드시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차가 맞는지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 구입 의사를 밝혔다. 작가는 친절히 다음 달 경복궁 옆 서촌에서 열릴 개인전에 출품될 작품이라며, 미리 화랑에 이야기를 해 두겠다고 했다. 가격은 월급의 절반에 달했지만 홀린 듯 결정을 내렸다. 가족이나 지인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었다. 사회초년생이 하기엔 이성적이지 않은 선택이었고 투자 관점은 전혀 없이 오직 감성과 취향만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두근거리며 전시회를 기다렸다. 최초의 회화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라고 한다. 사냥의 성공과 풍요를 비는 주술이 회화의 시작이었다면 결국 그림의 본질은 강하게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데 있지 않을까. 나는 그 마력에 이끌린 듯했다.
개인전 첫날, KTX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열차 안에서 듣던 트와이스의 <Cheer Up>과 글렌체크의 <60’s Cardin>은 지금도 그날의 설렘을 되살린다. 경복궁을 지나 서촌 갤러리에 도착하니 가볍게 들른 관람객도 있었지만 전문가처럼 보이는 예술가와 컬렉터들도 보였다. ‘나도 저 여유로운 무리에 속하고 싶다’는 미묘한 경외심과 소외감이 함께 밀려왔다.
그림 옆에 붙은 빨간 스티커는 이미 판매가 완료됐다는 뜻이었다. 내가 예약한 그림 옆에도 레드닷(Red dot)이 붙어 있었다. 한 유명인이 전시 첫날 그 그림을 마음에 들어 했으나 내가 먼저 구입해 아쉬워했다고 했다는 후문을 들었을 때엔 괜히 뿌듯했다. 전시 후에는 작가와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작업 과정과 생각을 들으며 생경한 경험을 했다.
첫 컬렉팅을 계기로 여러 작가에 관심이 생겼고 미술 관련 책도 읽기 시작했다. 아트페어나 개인전을 찾아다니며 취향을 넓혀갔다. 하지만 선망이 깊어질수록 갖고 싶은 것을 사지 못하는 고통도 커져 요즘은 아트페어 방문을 자제하고 있지만.
마음에 드는 화가와 함께 나이 들어가며 변해가는 화풍에 따라 한 점씩 모아가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가치가 오르면 좋겠지만 ‘좋아하는 것을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동기부여가 더 크다. 평범한 월급쟁이가 컬렉팅을 오래 이어가긴 어려워 지금까지 두 점만 구입했고 현재는 관심만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그 화가가 유명해져 호당 가격이 올라 추가 구매는 힘들어졌다. 더 사두지 못한 게 아쉽다.
예술인의 삶은 작품 가치와도 연결된다. 때로는 대작 의혹이나 구설수, 도덕성 논란이 시세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과 예술인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대중이 예술을 소비하는 시대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컬렉터들은 “작가가 무탈하게, 착하게 살다 가셨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함께 나이 들어가다 훗날 다시 평가받는 과정, 그것이 컬렉팅의 묘미일지도 모른다. 예술품이 컬렉터에게 풍요와 안녕을 빌어주듯 컬렉터도 예술인의 안녕을 비는 일종의 선순환이다.
나의 그림은 지금도 내 ‘동굴’에서 원초적이고 주술적인 힘을 뿜어낸다. 나는 구석기인의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보며 오늘의 무탈함과 내일의 풍요를 기원하고 세상 밖으로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