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시작하면서 세탁을 자주 하게 됐다. 혹시라도 ‘홀애비 냄새’가 날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흰 옷끼리, 수건끼리, 일반 의류끼리, 울 의류끼리, 그리고 청바지끼리 따로 종류별로 분류해 세탁을 한다. 자취방엔 늘 빨래건조대가 펼쳐져 있다.
간단한 빨래는 자취방 드럼세탁기로 해결한다. 하지만 빨랫감이 쌓이거나 이불을 빨아야 할 때, 또는 장마철처럼 습한 날씨가 지속될 때면 커다란 이케아백에 빨랫감을 꾹꾹 눌러 담아 동네 코인세탁소로 향한다. 종이 섬유유연제도 결제해서 넣으면 마음이 더 포근해진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코인세탁소가 우연하고 로맨틱한 만남의 장소로 종종 등장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대부분 모자를 푹 눌러쓰고 슬리퍼에 츄리닝을 입은 사람들이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나간다. 어쩌면 무인점포라는 특성에 더 편안해지는지도 모른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집에 잠시 들렀다가 건조기로 옮길 때 즈음 책 한 권이나 스마트폰을 챙겨 다시 내려간다. 세탁 후 건조기가 돌아가는 시간 30분. 집에 돌아가기에도,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에도 애매하다. 결국 세탁소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면서 느슨한 시간을 흘려 보낸다.
어느 여름, 장마 중 잠시 비가 멈춘 주말이었다. 그간 밀려있던 빨래들을 한꺼번에 챙겨 자취방 근처의 코인세탁소로 향했다. 당시 자취하던 합정, 망원 일대는 나중에 알고 보니 성소수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고 한다. 지방에서는 같은 성향의 사람을 만나기 어려우니 자연스럽게 서울로, 그리고 서울 안에서도 편안히 어울릴 수 있는 지역이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처음에는 길가에서 성소수자 커플들의 스킨십이나 연애 모습을 보면 낯설게 느껴졌지만 어느 순간부턴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게 되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세탁물을 넣고 잠시 의자에 앉아 있던 중,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웃으며 들어왔다. 그중 한 사람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학창 시절, 고향에서 같은 학군에 있었던 A였다. 당시에도 A는 자신의 성적 취향을 숨기지 않던 인물이었다. 졸업 후엔 이름도 잊고 지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마주한 것이었다. 서로 놀라서 "네가 왜 여기서 나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조용히 각자의 익명성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마도 A는 자신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도시, 그리고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을 찾아 서울에 정착한 것이 아닐까.
직장인은 누구나 여러 개의 페르소나(persona)를 지닌 채 살아간다. 나 역시 ‘은행원’이라는 이름 아래 하루 대부분을 보낸다. 단정한 머리와 옷차림, 공손한 말투와 웃음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정체성이자 역할이다. 인근 자영업자분들에게는 OO은행 소속의 XXX 은행원으로서, 되도록 지점 근처 상권에서 밥도 먹고 물건도 사며 거래를 유지할 수 있는 유대감을 쌓는다. 가게에 들르면 사장님들은 반갑게 맞아주시고 때때로 금융 상담을 청하기도 한다. 퇴근 후에도 그 페르소나를 벗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무인점포의 증가는 조금 다른 감정을 남긴다. 무인 세탁소,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무인 스터디카페, 무인 편의점. 사람을 마주할 일은 줄고, 얼굴을 익힐 기회도 함께 사라진다. 익명성의 편안함은 반가우면서도, 이젠 점주권 영업은 어떻게 해야 하나 문득 고민이 되기도 한다.
그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배경 삼아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 이름도, 역할도 내려놓고,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으며 그저 존재하는 순간. 그럴 때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프터 다크』가 떠오른다. 한밤중 도심의 카페. 모두가 자신의 일을 하며, 아무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조용한 공간. 익명 속에서조차 희미하게 연결되는 사람들. 머물다 사라지는 풍경.
그리고 어느새 건조기에서 뽀송뽀송한 냄새가 피어오르면, 나는 다시 이름 있는 세상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