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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ki Jul 26. 2024

우울증을 극복할 때의 징조

다시 우울증이 발병했지만, 한번 적어볼까 합니다.


나에게는 1차 우울증 시기와 2차 우울증 시기가 있었다.


첫 번째 우울증은 학교에 딸린 심리 상담 센터를 다니고, 인생의 실패를 겪은 후 괜찮아졌다.


2차 우울증은 사람으로 인해 온 거라 아직 치료 중이다. 하지만 첫 번째 우울증은, 심리 상담과 자력으로 괜찮아진 거라고 봐도 무방한데, 이때 나타났던 징조들을 다시 한번 적어보려고 한다.





들어가기에 앞서, 1차 우울증은 거의 대부분 부모님으로 인한 것인데(물론 회사도 있다), 나는 부모님의 터무니없는 기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통제적 회피형인 어머니와, 불안형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부모님이 원하는 직장에 취직하지 못했던 나는 이상하게도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다.


부모님이 원하는 기업은 2개뿐이었다. 대기업과 공무원. 


여기에 내 의사는 전혀 없었으며,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을 뿐인데 나는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녀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결국, 나는 부모님의 기대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대기업 계약직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다. 계약직에 합격한 그 순간이, 부모님이 나를 낳고 가장 기뻐했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대기업 문화가 미친 듯이 맞지 않아 계약직에서 정규직이 될 의욕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정규직이 되길 꿈꿨고, 강요했다.


부모님과의 마찰이 더욱 심해졌다.(원래도 마찰이 있었다.)


그렇게 우울증의 정점을 찍었고, 나는 참지 못하고 계약직 기간을 채우자마자 회사를 그만두었다. 부모님과는 당연히 사이가 안 좋아졌고, 이젠 공무원 시험뿐이라느니, 니 인생은 거기서 끝났다느니, 온갖 소리를 들었다.


이게, 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자 겪었던 일이다.


그리고 나서였다. 내 우울증은 최악을 찍었다.





1. 우울증의 최악을 찍는다.


우울증을 극복할 때, 나오는 신호들인데 최악을 찍는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가?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나는 분명 공무원 시험 낙방 후 우울증의 최악을 찍었다. 웃긴 게 너무 적성에 안 맞아서 시험 준비를 1년도 안 했다. 그런데 이 시절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근데 죽고 싶다는 거, 은근히 무서워서 못하겠더라. 근데 이 생각을 하면서 또 우울해졌다. 아. 나는 죽을 용기조차 없는 머저리 같은 자식이구나.


정말 우울하면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단 걸 처음 알았다. 


죽는 것에 성공하는 건 멋진 사람들이구나. 소인배에 머저리 같고, 멍청한 나는 벼락 맞아 죽어 마땅하다. 아니면 제발 교통사고가 났으면, 근데 안 아프게 죽고 싶다. 나 같은 놈이 안 아프게 죽는 것도 욕심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진짜 거의 매일 했다.

그러니까, 우울한 거에서 끝나지 않고 우울해서 만들어진 결과와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한 사소한 행동조차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쓰레기 같고 싫었다. 그 때문인지 이 시절 몸무게가 50 이하로 까지 떨어졌었다.


회사를 퇴근할 때마다 울면서 퇴근하고, 아침에는 방긋방긋 웃었다. 그게 또 현타가 와서 우울증이 심해졌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진짜 바닥을 찍었다. 





2. 남들에게 맞출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이었다.


공무원 시험에도 낙방하고,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가지 못한 나약한 나를 혼내던 부모님의 말을 듣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왜 이러고 있지? 왜 부모님 말을 듣고 있지? 몇개월 전 심리 상담 선생님이 말씀하신 말이, 갑자기 불현듯 떠올랐다. 


그 상황에 머물러 있고 싶으세요?


그러자, 깨달았다. 아니었다. 나는 이 상황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임시로라도 부모님이 원하는 직장, 원하는 대학, 원하는 자취방까지.


그러니까 내가 맞추고 있었던 거다. 


사실 부모님도 엄밀히 말하자면 남이다. 남편도 남이다. 가족도 남이다. 나는 남을 위해 내 근본까지 갉아먹어가며 맞춰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경우 우울증은 나를 갉아먹으면서 남을 맞춰줄 때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행동하기 시작했다.







3. 나를 위한 선택을 한다.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는 걸 학교 다닐 때부터 누누이 들어왔다. 지금도 집엔 온갖 백일장 상장들이 가득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즐거워할 직업이 뭐가 있을까, 재미있어할 직업이 뭐가 있을까. 그러면서 전공도 살릴 만한 직업이 뭐가 있을까.


그렇게 나온 직업이 기획, 에디터, 작가였다. 그리고 나는 그 직업들을 얻기 위해 취준과 투고를 시작했다. 부모님이 글쓰기는 취미로 하라고 해도 무시하고 진행했다. 근데, 이게 왠열? 계약직 때도 수십 번은 낙방했던 취직이 한방이 되고, 원고를 본 출판사들이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물론 상업적인 쪽으로만 움직였지만, 그게 참 신기했다. 그렇게 나는 작가 프리랜서가 되었다.


그렇게 소소한 성취들이 쌓여갔다. 그러자, 신기하게 우울증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아지니, 회사도 같이 겸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돈이 모이고, 인맥이 쌓이고, 경험이 쌓이자 우울증이 확연하게 사라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심리 상담 센터 선생님에게 오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걸 보고, 네가 재능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라는 소리가 나올까 봐 미리 말하는데, 사실 적성에 맞는 직업은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냐고?


우울증 걸리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판단력'이 떨어진다는 거다. 


판단력은 생각보다 인생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니까 나 같은 경우, 기획과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부모님의 말을 따라 대기업과 공무원 시험에 올인해서 생긴 문제다. 


즉, 우울증에 걸리면 당신이 평생 해도 되지 않을 일을 물고 늘어진다. 


짧은 인생이지만 감히 말하건대, 인생은 되는 거 먼저 해결하고, 하고 싶은 건 장기전으로 계획하면서 진행해라. 왜냐면,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우리 같은 인간들은 '성취'라는 걸 맛봐야 버틸 수가 있다. '성취'를 얻기 위해선 남들이 인정하는 직업, 남들이 부러워하는 가시적인 성과에 매달리는 것보다 본인이 좋아하는 성과에 매달리는 게 빠르다.


그러니까, 여러분. 남들에게 맞추려고 애쓸 필요 없다. 남들보다 못한 인생 살면 어떤가. 죽으면 다 똑같이 흙이다. 실제로 나는 남들에게 모자람 없이 보이려는 욕심(불교에선 번뇌라고 실제로 칭한다)을 버린 순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다시 우울증이 도지긴 해도, 그때보단 낫다. 그때 만들어놓은 기반이 있고,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도 나름 알고 있다. 극복에 성공했을 때 나오는 징조들도 알고 있다. 그러니, 좀 더 빨리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때 판단력이 떨어져 잘못한 선택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음 편엔, 우울증에 했던 대표적인 실수 몇 가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우울증은 판단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나아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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