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빅 당신은 우울증입니다
이번엔, 내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 나타났던 대표적인 증상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우울하다거나 갑자기 운다거나 하는 흔한 증상들 말고, 우울증으로 인해 실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증상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고, 모두가 하는 행동 같다 생각하겠지만 아닌 게 생각보다 꽤 많다.
이 증상의 공통점은, 우울증 약을 먹으니 놀랄 만큼 괜찮아졌다는 점이다.
그런 증상들로만 글을 적었으니, 아마 당신이 이 증상을 가지고 있다면 우울증을 의심해 보길 바란다.
1. 약속을 쉽게 깜빡깜빡한다.
건망증. 생각보다 쉽게 있는 질환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조금 다르다. 건망증이라 휴대폰이나 다이어리에 약속을 적어두는 것조차 깜빡하는 증상을 말하는 거다. 혹은, 다른 약속 날짜와 헷갈려 바꾸어 기억한 것까지도 포함이다.
이게 어떻게 우울증 증상 중 하나냐고? 당연하다. 당신의 뇌는 우울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기억할 정신머리가 없기 때문이다. 몰랐겠지만 건망증 역시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다.
사실 건망증이 오는 건 증상이 심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건망증도 심하게 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약한 건망증으로는 우울하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경우가 다수일 거다. 좀 즐거워지고 나면 기억력이 다시 회복하는 경우도 있다. 단순 우울증이 아니라 스트레스로 인해 잠시 기억력 저하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약속을 챙기는 알람을 만들어두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진다.
하지만 아래의 현상들이 나타나면 조금은 얘기가 달라진다.
2. 글이 읽히지 않아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와중에도 글이 튕겨나가는가? 두줄 이상 글을 읽으려고 하면 글자가 흩어져 사라지는 기분을 받는가? 아니면 한 장 정도의 글은 괜찮은데 두장부터 글이 읽히지 않는가? ADHD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아니다. ADHD는 생각보다 그렇게 쉬운 질병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증세가 있어야 한다. 갑자기 그렇게 읽히지 않게 되었다면 당신은 우울증일 확률이 높다.
글이 읽히지 않는 것, 즉 뇌가 우울에 빠져 글을 읽을 여력이 있는 것 또한 우울증 증상 중 하나다.
일명 브레인 포그라고 하는데, 나는 이 증상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주제에, 글이 읽히지 않는다니. 당연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정신과에 찾아가 약을 받아오게 된 계기도 글이 읽히지 않는 게 점점 더 심해져서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한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게 두 문장, 한 장, 두장, 세장, 네 장이 되더니 모 서점 VIP를 찍을 정도로 책을 많이 사고 읽던 내가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자극적인 숏폼 역시도 좀만 길어지면 보지 않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당신이 지금 글이 읽히지 않는다면, 재미있게 읽었던 글도 읽히지 않는다면 한 번쯤 우울증을 의심하길 바란다. 우울증을 자각하지 못하면 당신의 뇌는 점차 우울에 빠지고, 천천히 작동이 느려지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막는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약을 먹고 이 증상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확연하게 나아진 건 아니다. 예전만큼의 독서력으로 돌아온 상태는 아니다.
글을 읽는 건 보통 일의 능률과도 연결되니 당신의 능률을 지키고 싶다면, 최대한 빨리 정신과에 방문해 약을 먹는 걸 추천한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말이다.
3. 시간 감각이 없다.
모두가 바쁘게 살면 그렇지 않냐고? 아니다. 우울증에 걸릴 경우 인지능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시간감각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지경에 이르면 솔직히, 글이 읽히지 않는 것보다 심각할 확률이 높다. 시간감각은 글과는 다르다. 글은 내가 노력해서 '읽어야 하는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는 건 노력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해는 뜨고 지는데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상황이 심각할 확률이 높다.
나에게 이 증상이 나타났을 땐, 내 우울과 불안은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처음엔 내가 시간감각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브레인 포그 현상으로 일을 하는 게 너무 힘들고 우울하고 슬퍼서, 정신과를 찾게 되었다. 정신과에서는 내게 물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하지만 나는 그 평범한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요일이 아니라면 날짜도 좋아요. 그 대답에도 답하지 못했다. 그 이외에도 여러 시간에 대한 질문들을 했는데, 나는 답하지 못했다.
"인지 능력이 많이 떨어지셨네요."
인지 능력이 최고조로 떨어졌을 때, 시간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간다는 개념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우스운 말 같은가? 직접 겪어보면 안다. 그냥 아침부터 멍하니 휴대폰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1 시인, 그런 상황도 많았다.
그게 우울증 증상 중 하나였다.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그런 증상들이 사라졌다. 예전엔 시간감각이 없어 제가 잘 까먹는다면서, 우스갯소리로 넘기곤 했는데 이젠 무슨 요일에요?라고 묻는다면 답할 정신머리는 충분히 된다.
4. (번외) 잘못된 선택을 한다.
내가 쓴 징조들을 보면 알겠지만, 우울증에 걸리면 뇌는 평소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단 말이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잦다.
나르시시스트인 사람을 멋지다 생각해, 친해지려 한다.
회피형인 애인에게 부득불 맞춰주려 한다.
당신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한다.
불가능하고, 어쩌면 당신의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일들에 매달리고,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우울해한다. 한마디로 지팔지꼰을 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우울증 증상일 경우가 높다. 왜냐면 우울증에 걸린 환자의 뇌는 더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내가 익숙한 곳으로 가게 된다.
그렇다. 우울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아마 당신은 왜 이렇게 수렁에 빠지지 라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 마음 잘 안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 수렁을 빠져나오기 위해선 생각보다 큰 결단을 해야 한다. 우울이 익숙해진 뇌를 이기고 그 우울에서 빠져나오는 거다.
그 과정은 혼자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렇다면 정신과에 가서 약의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우울의 수렁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냐고 한다면, 잘 모르겠다. 빠져나오진 않은 것 같다. 왜냐면 아직도 가끔씩 우울이 찾아오고 슬퍼하고, 슬퍼하지 않게 회피하고 그렇게 또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냥 그런 생각을 한다.
인생이란 게 그런 게 아니겠냐고. 바닥을 찍고 나면 튕겨 오르는 법이지 않던가. 그러다 보면 언젠간 풀리지 않을까 하면서 살고 있다. 실제로 수월하게 타인의 도움으로 인생이 풀린 적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우울증이지만 사회생활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으며 살았다. 물론 사회 초년생 때에는 정말 많이 얻어맞았다. 우울증으로 인한 브레인포그, 감정 결여, 그야말로 갑분싸를 만드는 주범에서 지금은 스마트하고 일처리 잘한다는 소리 정도는 듣는 인간이 되었다.
우울증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그 팁을 다음 편에 써볼까 한다.
이게 아니라면, 우울증에 도움이 되었던 사소한 물건들을 소개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