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가 울린 건 오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선배의 퇴사 소식이 알려진 날, 많은 연락에 시달리고 있으실 게 눈앞에 훤해서 연락하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것은 내가 당신이 이 메시지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니 답장을 해야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마음 편할 때 언제든 연락 주시오,라는 뉘앙스를 담은 선택이었다. 답장은 없었다. 애초에 일방적인 감정 발산이었기에 섭섭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열흘 하고도 이틀이 흐른 뒤전화를 받았다. 약간 술에 취한 듯한 선배의 목소리를 들으니 왈칵 눈물이 났다. 회사에 몇 명 되지 않는 존경하는 선배가 회사를 떠났다는 점, 우리가 더는 한배에 타고 있지 않다는 점, 얼마나 깊은 고민을 거쳐 이런 결정을 내리셨을까 하는 점 등이 길지 않은 통화에서 묻어났다. 평소에는 오그라드는 말을 절대 입 밖에 내시지 않았던 양반이 아마도 이때 밀렸던 연락을 몰아서 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지셨던 듯싶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이는 좋았다(고 나는 믿는다). 선배는 머리였고, 나는 꼬리였다.선배는 언제나 내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안내했고, 나는 열심히 헤엄쳤다. 가끔 잔꾀를 쓰다가 들통나기도 했지만. 선배라는 버팀목이 있었기에 나는 늘 안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조직 안보다는 조직 밖에서 삶의 재미와 안정을 찾았었다. 그랬기에 비단 선배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을 그었다. 다 함께 하하 호호 웃으면서 일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업무 공간 밖에서의 당신의 삶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나의 삶도 공유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선배는 나를 챙겨주지 못해서 늘 미안했다고 하셨다. 당신이 나를 챙기지 않은 이유는 혼자 알아서 척척 잘 해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네가 어디에 가더라도 네 몫의 200% 300%를 해낼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을 해주셨다. 난 아무래도 내 능력을 과대하게 포장하는 능력이 있나 보다. 선배가 어디에 계시든 늘 행복하시길. 그리고 언젠가 나도 월급의 중력을 이겨내는 날이 오기를.
가끔, 내가 쓴 글 중에 몇번이고 다시 들여다보는 글이 있다. 내가 선배에게 보낸 문자도 그중 하나다. 아참, 이 선배는 이후 중력의 무게가 훨씬 더 나가는 곳으로 직장을 옮기며 업을 바꾸셨다.
"선배 안녕하세요. 다른 회사 사람들보다 연락이 좀 늦었습니다. 몇 주 전에 선배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선뜻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회사 생활 N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존경하는 선배를 떠나보내는 일이 처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선배가 크게 웃으시며 '네가 나를 존경한다고?' 하실 모습이 제 머릿속에서 재생되네요 ㅋㅋ 제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니면 말씀드릴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사실 저의 마음은 그러하옵니다!
20XX년 10월 제가 다시 ○○○로 발령 났을 때 사실 절망감이 컸습니다. 인사야 원래 제 뜻대로 된 적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나가고 싶어서 그렇게 발버둥 쳤던 ○○○에 다시 매일같이 발을 들여야 한다는 게 초반에는 썩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 생활은 제가 염려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다 선배 덕분이라고 믿습니다. '어떻게 일도 잘하시는데 인품까지 훌륭하시지?'라는 생각을 늘 했었죠 ㅋㅋ 돌이켜보면 저는 저의 '○○○ 2기'에 만난 ○○팀 선배들과 마음을 열고 지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 저의 못난 성격 탓이지만 굳이 핑계를 대자면 두 번째 ○○ 생활 때에는 다른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재미를 더 느꼈나 봅니다.
선배가 얼마나 오랜 숙고를 거쳐 이번 결정을 내리셨는지 제가 감히 헤아릴 수 없겠죠.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나서부터 월급의 중력을 이겨낸 사람들을 늘 우러러봐 왔습니다. 저도 언젠가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의 발현이겠죠? 선배! 선배는 어디에 계시더라도 늘 빛이 나는 사람으로 모두의 사랑을 받을 거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사람 보는 통찰력이 좀 있거든요. 이제 더는 선배와 같은 조직에 있지는 않지만 언제나 선배를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혹시 나중에 회사 후배들 볼 일 있으시면 그때 저도 한 번 끼워주세요. 물론 저만 따로 봐주셔도 영광이고요. 정신없으실 텐 제가 카톡으로 보내면 답장을 보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실까 봐 문자로 짧은 편지를 한 장 써봤습니다. 답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해주세요. 날씨가 다시 추워졌습니다. 언제나 건강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