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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C쁠 Feb 19. 2024

월급의 중력을 이겨낸 선배에게

2023년 12월 미국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바라본 맨하탄

전화기가 울린 건 오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선배의 퇴사 소식이 알려진 날, 많은 연락에 시달리고 있으실 게 눈앞에 훤해서 연락하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것은 내가 당신이 이 메시지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니 답장을 해야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마음 편할 때 언제든 연락 주시오,라는 뉘앙스를 담은 선택이었다. 답장은 없었다. 애초에 일방적인 감정 발산이었기에 섭섭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열흘 하고도 이틀이 흐른 뒤 전화를 받았다. 약간 술에 취한 듯한 선배의 목소리를 들으니 왈칵 눈물이 났다. 회사에 몇 명 되지 않는 존경하는 선배가 회사를 떠났다는 점, 우리가 더는 한배에 타고 있지 않다는 점, 얼마나 깊은 고민을 거쳐 이런 결정을 내리셨을까 하는 점 등이 길지 않은 통화에서 묻어났다. 평소에는 오그라드는 말을 절대 입 밖에 내시지 않았던 양반이 아마도 이때 밀렸던 연락을 몰아서 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지셨던 듯싶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이는 좋았다(고 나는 믿는다). 선배는 머리였고, 나는 꼬리였다. 선배는 언제나 내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안내했고, 나는 열심히 헤엄쳤다. 가끔 잔꾀를 쓰다가 들통나기도 했지만. 선배라는 버팀목이 있었기에 나는 늘 안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조직 안보다는 조직 밖에서 삶의 재미와 안정을 찾았었다. 그랬기에 비단 선배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을 그었다. 다 함께 하하 호호 웃으면서 일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업무 공간 밖에서의 당신의 삶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나의 삶도 공유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선배는 나를 챙겨주지 못해서 늘 미안했다고 하셨다. 당신이 나를 챙기지 않은 이유는 혼자 알아서 척척 잘 해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네가 어디에 가더라도 네 몫의 200% 300%를 해낼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을 해주셨다. 난 아무래도 내 능력을 과대하게 포장하는 능력이 있나 보다. 선배가 어디에 계시든 늘 행복하시길. 그리고 언젠가 나도 월급의 중력을 이겨내는 날이 오기를.


가끔, 내가 쓴 글 중에 몇번이고 다시 들여다보는 글이 있다. 내가 선배에게 보낸 문자도 그중 하나다. 참, 이 선배는 이후 중력의 무게가 훨씬 더 나가는 곳으로 직장을 옮며 업을 바꾸셨.


"선배 안녕하세요. 다른 회사 사람들보다 연락이 좀 늦었습니다. 몇 주 전에 선배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선뜻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회사 생활 N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존경하는 선배를 떠나보내는 일이 처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선배가 크게 웃으시며 '네가 나를 존경한다고?' 하실 모습이 제 머릿속에서 재생되네요 ㅋㅋ 제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니면 말씀드릴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사실 저의 마음은 그러하옵니다!


20XX년 10월 제가 다시 ○○○발령 났을 때 사실 절망감이 컸습니다. 인사야 원래 제 뜻대로 된 적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나가고 싶어서 그렇게 발버둥 쳤던 ○○○에 다시 매일같이 발을 들여야 한다는 게 초반에는 썩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 생활은 제가 염려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다 선배 덕분이라고 믿습니다. '어떻게 일도 잘하시는데 인품까지 훌륭하시지?'라는 생각을 늘 했었죠 ㅋㅋ 돌이켜보면 저는 저의 '○○○ 2기'에 만난 ○○팀 선배들과 마음을 열고 지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 저의 못난 성격 탓이지만 굳이 핑계를 대자면 두 번째 ○○ 생활 때에는 다른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재미를 더 느꼈나 봅니다.


선배가 얼마나 오랜 숙고를 거쳐 이번 결정을 내리셨는지 제가 감히 헤아릴 수 없겠죠.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나서부터 월급의 중력을 이겨낸 사람들을 늘 우러러봐 왔습니다. 저도 언젠가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의 발현이겠죠? 선배! 선배는 어디에 계시더라도 늘 빛이 나는 사람으로 모두의 사랑을 받을 거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사람 보는 통찰력이 좀 있거든요. 이제 더는 선배와 같은 조직에 있지는 않지만 언제나 선배를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혹시 나중에 회사 후배들 볼 일 있으시면 그때 저도 한 번 끼워주세요. 물론 저만 따로 봐주셔도 영광이고요. 정신없으실 텐 제가 카톡으로 보내면 답장을 보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실까 봐 문자로 짧은 편지를 한 장 써봤습니다. 답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해주세요. 날씨가 다시 추워졌습니다. 언제나 건강 챙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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