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초창기, 삶은 고난의 연속처럼 느껴졌다.수강신청부터 스텝이 꼬였고 조모임까지 뭐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게 없었다. 일면식도 없는 교수에게 다짜고짜 메일을 보내거나 수업시간에 무작정 찾아가기를 반복했고, 타과생이 가득한 복수전공 수업에서 학번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조장을 맡아야 했다. 학기 초 3살 어린 후배와 시작한 연애는 대체로 속앓이만 하다석달 도 채우지 못하고끝이났다.취업에 대한 걱정은 공기처럼내 주위에 늘 머물러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일 아니지만,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는이런 것들이 참 버거웠나 보다.
그 시절 나를 위로해 준 건 달리기였다.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이 태반인데 달리기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온전히 내 의지만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던 나는 밤 10시면 우레탄 트랙이 깔린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타블로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1시간 남짓400m 운동장 25바퀴를 돌았다. 10바퀴를 뛰고, 5바퀴를 걷고, 다시 10바퀴를 뛰는 루틴이었다.하루 중 유일하게 성취감을 맛보는 시간이었다.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을 뛰다 보니 달리기는 어느덧 습관이 됐다. 아니, 강박이라고 부르는 게 맞으려나.
2023년 2월 파리에서 아침 달리기 마치고 뿌듯한 두통수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유형의 형태로 확인받고 싶었는지,나의 달리기 수준이 어느정도인지가늠하고 싶은 욕망이 나를 마라톤의 길로 이끌었다.대학생 때 10km에 이어 하프까지 완주했고, 취업 후친구들과 함께 풀코스에 참가하려 했으나 근무 중 인대가 파열되는 바람에42.195km 도전은 물 건너갔다.어느덧 마라톤에 처음 발을 들인 지 10년이 지났다.요즘도 가능하면10km 대회에는참가하려 한다. 마라톤은 나와의 싸움이다. 기록이 좋아져도, 나빠져도 이기는 건 과거의 나이든 현재의 나이든 항상 나라서 다행이다.
사실 나는 달리기를 꾸준히 할 뿐이지 좋아하는 건 아니다.달리는 이유는 딱 하나,먹는 족족 살이 찌기 때문이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계기도 미국에서 교환학생 때 한 학기만에 10kg 넘게 찐 살을 빼기 위해서였다. 만약 내가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면 절대 달리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마음가짐이 이러하니 헬스장으로 출발하기까지 갈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이곤 한다. 하지만 일단 땀을 한 번 흘리고 나면 후회한 적이 없다.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니 운동복을 챙겨 입고 문밖으로 나서게 된다.예나 지금이나 달리기에서 나는 위로를 얻고 있나보다.오늘도귀찮지만, 일단달리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