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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asel Aug 31. 2021

글래스고의 겨울


2018년 1월.


글래스고는 11월 말부터 해가 무척이나 짧아지기 시작해서, 12월에는 3시 반이면 해가 지곤 한다. 가장 밤이 길고 어두웠던 크리스마스를 지나 이제 1월 말로 접어들면서는 그나마 4시가 넘어야 해가 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여전히 글래스고의 겨울은 길고 지루하다. 서울에 비하면 날씨가 추운 것은 아니지만 질퍽한 눈이나 비가 잦고, 밤새 내린 서리에 식물들은 바싹 마른 은빛을 띤다. 생각해보면 상대적으로 동양 문화권에서는 은빛이라는 색조로 무언가를 묘사하는 일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곳에 와보니 희끄무레한 은색은 무척 흔한 색깔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가 온 후에 약간 반짝이는 흐릿한 하늘, 촉촉한 빗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나는 도로, 잎사귀에 내려앉은 차갑고 까슬까슬한 서리. 그러니까, 은색은 이곳 겨울의 주된 색조인 것이다.



보통은 비가 더 자주 오긴 하지만, 얼마 전에는 제법 오랫동안 함박눈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안 그래도 서울에 비해서 조용하게 느껴지는 도시가 더 고요하고 한적 해지는 듯하다. 이상하게 눈이 오는 날은 소리들이 포근하게 뭉개지면서, 오히려 맑은 날보다도 덜 싸늘한 느낌이 드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도로를 달리는 차들(물론 이날은 차들이 눈 때문에 쌩쌩 달리지도 못했지만)의 소음이나 사람들의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스며들어, 어쩐지 모르게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통근을 해야 하는 운전자들에게는 물론 미안한 일이지만, 나처럼 도시 한가운데에 사는 365일 보행자에게는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이 기쁘다. 이곳의 눈은 무미건조한 일상에 그나마 흥밋거리를 더하는 작은 이벤트니까. 그리고 이렇게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지, 꼭 눈이 내리는 날이나 눈이 온 다음 날에는 이곳 친구들의 sns에 하나같이 눈 내린 풍경사진이나 동영상이 올라온다. 다들 심심하구나 싶기도 하고,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눈을 좋아하는 게 아직은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예전에 한 번은 오랜만에 아주 펑펑 함박눈이 내려, 친구들과 우산을 쓰고 나가 무작정 눈을 즐겼다. 바람이 불면서 눈이 내리는 탓에 코트가 흠뻑 젖어버렸고, 원래 목적지였던 식물원까지는 반의 반도 가지 못하고 추위에 떨다 결국 "차 마시러 갈래?"하고 실내로 들어가 버리긴 했지만. 눈이 펑펑 나리는 도보에서 어린애들처럼 깔깔거리고 신나 하던 기억은 이 지루한 겨울의 가장 명랑하고 활기찬 기억 중에 하나다. 


하지만 눈보다 더 큰 즐거움, 그리고 이 겨울에 가장 흔하고 소박한 즐거움은 차를 마시는 것이다. 사실 즐거움이라고 표현하기도 뭐한 게, 이곳에서 차는 거의 생활필수품 같은 느낌이라 '이거라도 없었으면 어떻게 버텼을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네시가 넘으면 어둑해지는 이곳에서는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다. 물론 마음을 먹으면 클럽에도 가고, 펍에도 가서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하겠지만 10시가 넘어도 사람들로 가득한 서울에 비하면  이곳의 밤 문화는 초라하다. 24시간 손님을 받는 카페나 노래방, 새벽까지 술과 고기를 파는 음식점들이 가득하고, 그곳을 메우고 있는 인파가 없는 밤. 7시가 되면 대부분 문을 닫는 가게들. 그나마 오락거리라 하면 친구들을 불러 집에서 홈 파티를 하는 것인데, 그것 역시 밖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차갑고 축축한 비와 무시무시한 바람(얼마 전에 세 번째로 산 우산도 바람에 휘어져 망가지는 바람에-거의 부서졌다-, 네 번째 우산을 사야 했다) 때문에 날이 흐린 날에는 바깥에 나가고픈 욕구 자체가 생기질 않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날씨.
그러니까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 안에 몸이 묶인 그런 날에는, 차가 필수적인 것이다(혹은 취향에 따라 도수가 강한 술, 예컨대 위스키).

눈 오는 저녁의 티룸 The butterfly and the pig


나는 원래도 차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한국에서 차를 기호식품으로 마시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정말 물 마시듯이 차를 마시고 있다. 여기에는 마트에 가도 차 종류가 무척 많고, 아주 저렴하게 대중화되어 있는 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보던 고급 사셰 티백보다는, 약간 부직포 같은 재질의 티백 꽁다리도 없는 20-50개 들이 티백이 흔하다. 그런 차들은 거의 생필품 수준이고, 나도 어쩌다 보니 한국에서 '아 여유롭게 차를 즐겨요'하던 사치스러운 마음보다는 그냥 보리차를 마시는 수준으로 홍차를 마시는 것 같다. 얼마 전 중국 친구가 가져온 중국 다기를 보고 나서는, 나도 물욕이 생겨서 제대로 된 찻주전자도 하나 사고, 부직포 티백이 아닌 제대로 된 잎차를 사서 마셔볼까 하는 마음도 드는데 가난한 학생 신분에 너무 사치가 아닌가 싶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어찌 되었건 여기서 차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차를 마시는 시간은 소중하다. 특히 눈이 오는 날 아늑한 실내에서 차를 마시며 창 밖을 볼 수 있다면, 여기서는 그만한 사치가 없다. 


나는 여전히 겨울이 싫지만, 그래도 바깥이 추워 안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어서 봄이 와서 연둣빛 싹들이 움트길, 낮이 조금 더 길어지길 바라고 있지만 가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머그잔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지난한 시간이 조금 보드랍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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