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억

by Scribblie

첫 날을 떠올려본다. 처음으로 킹스턴 구청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날. 주영한국대사관에서 아는 한, 영국 공무원으로 일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라 했다.

출근 첫날, 로비에서 민원인 마냥 초조하게 레슬리를 기다리던 와중에도 연신 올려다보며 탐미했던 연식 적잖은 회사 건물의 구조


어수선했다. 생각했던 사무실과 그 모습은 달랐다. 어수선했던 건 내가 낯설어서만은 아니었다는 걸 차차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곳은 한국의 붙박이 공무원 사회와는 달리 2년 계약 단위의 퇴직과 해고 그리고 빈번한 이직으로 늘 어수선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처럼 직원들을 모아 두고 한 번에 인사시키고 그런 건 없었다. 한국에서도 조직마다 문화가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레슬리가 데리고 다니며 알아야 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각각 소개를 해주었고, 보통은 천사같이 친절했지만, 떠나는 날까지 불편했던 빨간 바지의 게리는 영국인들이 탑재하고 있는 가짜 친절도 보이질 않았다. 뚱뚱한 스크루지 타입이라고나 할까? 영국인들만의 심퉁같아 보이는 무뚝뚝함이란 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게 순회 인사를 마치고, 차후에 이메일마다 나에게 Lovely XX라 호칭했던 "Lovely Carola"를 만나러 갔다. 인사과에 들어섰을 때, 유난히 친절한 밝은 노란 머리, 노란 머리만큼이나 환한 미소, 인색한 영국인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차를 권했던 중년의 캐롤라를 보았다. 그 눈부신 미소는 눈에 각인된 듯하다. 캐롤라는 티백 하나를 엄청난 생색과 함께 물에 담가주며 "영어 정말 힘들지? 나도 처음에 영국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어."라며 아이스 브레이킹 했다. 이제 보니 스페인 사람이 영어 어렵다 하는 건 정말 너무하다. 그때는 '영국인인 줄 알았더니 스페인 사람이구나? 스페인 사람들도 영어가 어렵구나?' 하며 위로를 받았다. 정착이나 아이 학교 이야기 같은 주변 잡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 나누었다.

캐롤라에게 담판을 지을 것이 있었기에 비장한 마음이었다. 그것은 근무시간이었다. MoU에 쓰여 있던 주당 근무시간에 대해 확인을 해야 했고, 아이의 등하교를 계획해야 했기에 출퇴근에 대해서 확실하게 해두어야 했다.


사원증이나 지문 체크랄지 출퇴근을 확인하는 시스템이 있나요?

지금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 우습기 그지없다. 지문 체크라니. 영국에서? 듣는 캐롤라가 표정의 변화를 주지 않은 것은 예의였으리라. 아마 여기가 무슨 감옥이냐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냥 주당 근무시간을 월간으로 계산해서 지키면 된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지문으로 출퇴근 체크를 했었다.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나라에 인간의 지문으로 출퇴근을 감시한다고 하면 신체 기본권의 침해라며 그 기관에 붙어있을 직원이 없을 것 같다. 그럼 사원증으로 체크인&아웃을 기록하는 시스템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매니저 리사와 너 사이의 Respect이야."라고 했다.

Respect

그 단어 Respect은 쇼크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는 사람을 감시하는 시스템이 기본이라 감시라 인지할 수도 없도록 물들어 있었는데, Respect라는 새 개념의 물결이 가슴으로 밀려드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그 신용, 상호의 믿음에서 오는 약속의 결박은 얼마나 단단한 것일까? 말하자면, 애당초 철저를 기대하지 않는 나라가 영국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앞으로 밀려올 근무 문화 놀래킴의 연속, 그 서막에 지나지 않았을 뿐. 여하튼, 인사과에서의 놀란 가슴은 반가울 따름이었다. 근무시간을 잘 계획해서 계약대로만 움직이면 된다니 아이와 둘이 하는 영국 생활에 참 다행이었다.

캐롤라에게 한 가지 더 확인할 게 있었다. '유럽최대 한인타운이 있는 이 행정구역의 관공서에 한국인이 나 하나일 리가 없다. 한국인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동앗줄처럼 잡아봐야겠다.'고 내심 생각했던 것이리라.

내가 아는 한 다른 한국인은 없어

대사관에서 그렇게 말했을 때만해도 설마했는데, 국적의 용광로 같던 사무실에, 한국인 직원이 나 하나일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한중일) 동양인은 참 없었다. 있더라도 보통 서류를 정리하는 단순 사무직이었다. 출근하고 1년까지 같은 사무실에 동양인이라고는 뉴몰든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국계 영국인뿐이었다.

인사과 옆벽에 걸려있던 시선을 끄는 자수, 킹스턴을 행정구역 별로 특징잡아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놀란 마음으로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엘리자베스가 쿠키를 권해줬다. 특별히 친절했고 늘 책상 위에 간식이 있었고, 본인 간식을 먹으며 먹어볼 거냐고 매번 권해줬던 엘리자베스는 삼일 만에 보이지 않았다.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다른 곳으로 이직한 것이었다. 이직은 그렇게 흔하고 평범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난 엘리자베스가 첫날 권해줬던 흔한 영국 과자 Bahlsen Choco Leibniz Milk를 스트레스받는 날에도, 허전한 날에도, 기쁜 날에도, 혼자 맥주를 깔 때도, 와인을 마실 때도 야금거렸다.

영국은 어쩜 이렇게 초콜릿의 질이 다 좋을까, 야금거리던 날 보던 우리 집 공돌이는 Leibniz? 미적분 만든 수학자 아냐? 그러거나 말거나 초콜릿 질이 너무 좋다며 바스락바스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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