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도 아시듯, 직장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중 하나가 점심식사이다. 이 말은 맞고도 틀린 말이지만, 이상 야릇하게 가장 신경쓰이고 정치적인 시간이 바로 점심시간이지 않은가?
15년 전 입사시절은 MZ세대 같은 용어도 존재하지 않던 기존의 근무 문화가 공고하던 때였다. 바로 MZ세대에 "어? 나도 껴주는 거야?하는 80년대 생이 바로 나이다. 빠른 81년에 태어남으로써 간신히 그 세대에 이름을 올린 자 중에서도 선구자였던 건지, 입사 애당초부터 "점심식사도 근무야",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야"같은 소리가 딱 역겨웠다.
가장 원했던 건, 점심시간 자체가 없거나 1시간 점심시간을 쓸 건지 말건지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한국에서는 망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니면, 식사를 각자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때론 그런 나도 업무긴 한데 업무시간에 정색하고 이야기하면 더 어렵게 풀릴 이야기를 슬쩍 흘리거나, 개인적으로 팀장님께 요청해야할 일인데 사무실에서 이야기하기 뭐한 이야기는 식사를 하러 오가는 길에 부드럽게 하는 등 아주 유용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근무 8시간에 포함되지도 않는 점심시간 따위 주지 않고 5시가 퇴근 시간이면 좋겠다. 그런데! 바로 그런 곳이 있었으니, 영국이었다.
영국 직장에 처음 나간 날,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이 "어떻게들 점심을 먹어?"하는 그들에겐 아주 이상한 질문이었다. 눈치를 봤다. 그래도 좀 친해지고 어울리려면 점심을 같이 먹어야할텐데, 언제 어떻게들 점심을 먹으러 나갈까? 한국처럼 우르르 같이 나가나? 한국처럼 팀식사비를 걷을까? 미치도록 궁금했다. 업무시간보다 더 긴장될 시간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매니저 리사에게 물어보니,
정해진 점심시간은 없어
약속이 있으면 나갈 수도 있고,
아니면 사무실에서 먹을 수도 있고,
보통 12시에서 2시 사이에들 먹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응?
뭐야, 점심시간이 없어?
그런데 점심은 나가서도 먹을 수 있다고?
그리고 퇴근은 5시라고?
이게 천국이야??
순간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해방감이 밀려온 것도 잠시. 12시쯤이 되자, 직원들은 사무실 한켠에 자기 도시락을 꺼내 편할 대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물론, 한순간 한꺼번에 몰려 점심식사를 시작한 것은 절대 아니다. 내적 갈등이 엄청나게 파도쳤다.
나도 저기 가서 끼어야하나?
아, 어색하다... 저기 가서 앉는다면 무슨 말을 해야할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차라리 업무이야기가 더 알아듣기 낫지, 영국 내에 돌고 있는 가십같은 걸 이야기하며 그들끼리 웃으면 더 못알아듣겠거니와 그 바보 같음을 어쩐다지? 차라리, 한국처럼 팀끼리 강제적으로 식사를 가는 게 나같은 이방인에게는 감사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쩔 수 없이라도 낄 수 있고, 어쩔 수 없이라도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하게 될테니까. 하아... 무엇하나 심장 쫄깃하지 않았던 게 없었던 시절이었다.
한숨 고르고 둘러보니, 그냥 자기 자리에서 먹는 사람도 있었다. 식사랄 것 없이 그냥 과자나 먹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그 부류에 끼자는 생각을 했다. 그날은 차라리 먹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차차 적응되면 저렇게 모여 앉는 곳에 한번 가보기로 숙제를 미뤄두기도 했다. 그 시절엔 아이와 둘이 살아낸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멘탈보호에 대한 방어기재가 극에 달해,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로 결심했었기에 '최상'을 하지는 않기로 했었다.
핫데스크 방식으로 정해진 자리 없이 책상을 공유하는 방식이니 자리에서 식사를 하지 말라는 메일이 돌고난 뒤엔, 각 층마다 있는 휴게공간에 창을 바라보고 앉아서 간단하게 밖에서 사온 음식이나, 전자레인지에 데워먹을 수 있는 음식을 챙겨와서 Hogsmill의 지류를 내려다 보며 영국인들처럼 허름한 식사했다. Hogsmaill 지류의 사계를 기록하듯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던 것 같다.
그해 여름을 기점으로 직원들이 많이 바뀌었다. 그래서 같이 모여서 먹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친한 사람들끼리 개인적으로 식사를 하러 나가는 것빼고는 사무실에서 식사를 모여앉아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다. 나도 그 이후 친해졌던, 인사과의 Carola나, 매니저 Lisa, 애증의 Chloe, 같은 이방인 몇몇과 1:1 Catch-up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가기도 했다. 세상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중국도 다녀와서 동양문화에 경계가 좀 덜하다고 추즉했던 리사에겐 컵밥을 점심시간에 경험시켜주기도 했다. 킹스턴 거리에 한국 밥집인데 점심시간에 그 집 컵밥이 불티나게 팔리는 걸 보며 컵밥을 소개하는 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서양인들은 시꺼먼 미역국을 못먹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급적 그래도 친화력 좋은 비빔밥에 소스를 조금 덜 넣는 것으로 소개를 했다. 우리 둘은 탕비실에서 같이 같이 밥을 데우고 건물 밖 벤치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컵밥을 먹었다. 컵밥의 가격을 알려주며 이렇게 싼데 이렇게 질이 좋다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래도, 그토록 한국에서 원했던 혼자만의 점심 여유를 즐기는 걸 더 추구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후배가, "요즘 조직문화가 많이 달라져서 한결 나아요"라고 했다. 돌아와보니, 현재 팀 구성원들이 그런 것인지, 정말 4년 사이 문화가 바뀐 것인지, 개인 약속도 일주일에 한번 이상 잡으면 눈치보이던 예전과는 다른 것 같아 보였다. 한국에서 일하다 본국으로 돌아간 미국인이 유투브에서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지금은 한국의 점심문화가 그립다."는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그 구속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