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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Jan 14. 2021

적당한 거리


#1


 외출할 일이 생기면 가방에 고양이 먹이를 꼭 하나씩 챙겨다닌다. 동네 고양이들의 식사를 손수 챙겨줄 만큼 성실하지는 않지만, 길에서 지내는 아이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서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 간식을 두둑하게 들고 다니기 시작한 무렵부터 좀처럼 고양이를 만나지 못했다. 일부러 고양이가 여럿 모여 사는 공원에 들러보기도 했지만, 이미 누군가 주기적으로 끼니를 해결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고양이를 만나더라도 경계심이 심해 금세 도망가버렸다. 그렇게 나는 먹지도 못하는 고양이 간식을 세 달동안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찾아왔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보고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아직 덩치가 작은 삼색 고양이가 조심조심 어두운 뒷골목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고양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 하에 후다닥 간식 봉지를 찾아 뜯었고, 녀석이 보는 앞에 조심히 몇 알 놓아주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지켜보던 삼색이는 한참동안이나 눈치를 살폈다. 먹고 싶은데, 내가 쳐다보는게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는 아차 싶어 멀찍이 물러나 애써 다른 곳을 쳐다봤다. 그제서야 삼색이도 쪼르르 다가와 먹이에 입을 댔다. 


 다음이 문제였다. 삼색이는 간식 몇 알이 성에 차지 않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먹이를 더 놓아주려고 가까이 가면 잔뜩 겁먹은 얼굴로 하악질을 했다. 흥. 나는 너 만질 생각도 없거든. 속으로 생각하며 같은 자리에 먹이를 더 보태줬다. 여전히 간격을 좁히기 싫었던 삼색이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더 멀리 떨어지라는 신호였다. 좀 더 가까이서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이 근처 벤치로 밀려났다. 자리에 앉아 또 딴청을 피우니 곧 오독오독 야무지게 간식을 씹어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입맛에 잘 맞는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삼색이는 기어이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적당한 거리에서 허기를 달랬고, 위로를 얻었다. 


#2


 며칠 전 예고없이 날아든 편지가 생각났다. 신용 카드 청구서나 정기적으로 배달되어 오는 잡지가 아니라면 내 앞으로 올 만한 우편물이 없는데. 엄마의 손에서 건네받은 갈색 봉투에는 뜻밖에도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신에게 보낼테니 잘 받으라는 예고도 없이 부쳐진 편지였다. 발신자는 사실 심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물리적으로는 먼 관계의 사람이었다. SNS나 메신저로 꾸준히 연락을 이어왔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지가 언제인지 쉽사리 기억나지 않는 존재. 그럼에도 서로의 관심사가 맞물렸을 때 언제든 반갑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 


 깜짝 선물같았던 편지 안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다정한 글자들이 적혀있었다. 그는 가장 씩씩했고, 그래서 제일 즐거웠던 나의 옛 모습들을 기억했다. 당신의 내일도 그 때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한결같이 기대하며 응원하겠노라고 이야기했다. 문장 사이사이에 남아있는 온기 때문인지 괜히 뭉클했다. 특히 2020년 12월 31일에 쓰여진 편지가 2021년 1월 11일 마침내 수신자에게 전해지기까지 혹독한 추위와 거센 눈보라를 견뎠을 생각을 하니 더 애틋해졌다. 편지를 주는데만 열흘이 넘게 걸리는 곳에서도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운이 났다.


 곧장 답장을 썼다. 다음날엔 눈을 뜨자마자 우체국으로 향했다. 직원은 내 작은 소포를 받아들며 여러 선택지를 줬다. 빠른 등기나 일반 등기, 그것도 아니면 그냥 우편으로 보낼 수도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가장 마지막으로 언급된 우편을 골랐다. 배송 조회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었지만, 상대에게 편지가 도착할 때까지 며칠간의 여유를 주고 싶었다. 물론 이쪽에서도 답장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나와의 적당한 거리 안에서 뜻밖의 기쁨을 느끼길 바랐다. 


#3      


 그와의 통화는 5개월 만이었다. 사실 다시는 목소리를 들을 일이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일을 통해 가까워진 사이인 만큼 직함을 떼고나면 우리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소원해질 것이라고 짐작했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마주쳤을 때는 오며가며 나눌 이야기가 많았는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지내면서는 접점이 아예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각자의 일상이 대화의 주제가 되어야만 했다. 실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던 시간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래 역시 회사 동료에서 친구로 이어지기란 쉽지 않지. 그동안 정말 즐거웠어.


 그런데 어느날 부재중 전화 기록에 그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눈이 펑펑 오는 날이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문득 생각이 나 전화를 했단다. 그는 간신히 퇴근 시간을 피했는데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릴 줄은 몰랐다고, 집이 코 앞에 있는데 지금 시속 10km로 달리고 있다고, 옆에 있는 차들은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볼멘소리를 늘어놨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몇 달만에 듣는 목소리였지만 툴툴거리는 말투와 무뚝뚝한 태도는 그대로였다. 난데없이 전화를 해서는 길이 막힌다며 하소연을 하다니. 동시에 안도했다. 우리는 이토록 사소한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구나. 


 '그럼 또 연락하자' '그래 운전 조심해'라는 말로 짧은 통화는 끝났다. 그제서야 진짜 친구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또 몇 달 간은 둘 중 누구도 먼저 전화를 걸지 않겠지만, 언젠가 갑자기 그가 떠올랐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전화를 걸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 때 나는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인데 눈 앞에서 지하철을 놓쳤다는 식의 시덥잖은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아직도 운전을 못하느냐며 핀잔을 듣게될 것이 뻔하다. 


 우리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생겼다. 무심하게 멀어졌고, 불쑥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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