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시작할 때 맞서 싸워야 할 '그것'
유튜브 <김창옥 TV 정기 강연회 1회>다. 시작하기에 앞서 두려움이 먼저 커졌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잘 알려주는 강연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sTeNSs2l-A)
누구나 아이일 적엔 무한한 책임감과 보호 속에서 보살핌을 받지만, 때가 되면 독립을 해야 한다. 안전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뻗어야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나이가 차면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그 첫 시작은 설렘보단 두려움이 훨씬 크다.
김창옥 교수는 두려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먼저, 두려움을 직시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쳐다보면 그 기저에 "남들보다 잘하고 싶고, 잘 되고 싶은 욕심"이 도사리고 있을 확률이 크다. 남들보다 차별 있게 잘하고 싶어 하는 욕심은 오히려 종종 두려움의 재료가 된다.
그렇게 마음의 적나라한 단면을 보고 난 이후엔 "작게 하려고 해야 한다." 다시말해 실수해도 좋다는 결심으로 해야 할 일을 해나가야 한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할 때 멋들어지고 완벽하게 하고 싶은 건 사람의 똑같은 마음이지만, 그 원하는 바를 위해선 사실 수많은 실수의 경험이 필요하다. 힘이 들고 두려워도 그것을 하는 사람과 하지 못하고 시작에서 지레 포기해버리는 사람의 길은 분명 다르다.
두 번째론, 감사하며 즐기는 것이다. 처음 시작하는 모든 상황에서 감사함을 갖는다. '첫 시작'을 할 수 있는 건 지나간 시간 동안 누군가의 바람막이 아래에서 보호받았다는 말과 같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그래서 독립하기 전 받은 보살핌들과 그리고 지금 가진 것들에 대해 늘 감사해야 한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순간, 아무리 많은 것을 갖고 있어도 행복할 수 없다.
감사함의 기준치는 가진 것보다 적은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가진 것보다 더 적은 것으로도 감사함을 느낄 수 있으면 현재 가진 것들에 대해선 좀 더 넉넉하게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게 되어서다.
이렇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지론'은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실수하며 작게 시작하라는 것으로 정리가 된다.
사람마다 첫 시작에 대한 경험이 있을 테지만 최근에 난 글쓰기를 통해 이 두려움을 마주했었다. 글 쓰는 걸 좋아했었고 때마다 레포트,논술,대회 등의 이유로 다양한 글들을 썼다. 그렇게 글을 써내도 난 내가 특출한 재능으로 글을 쓰는 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떤 '꽤 쓸만한 생각'이 잠시 머리에 머무를 때 손님을 맞이하듯 내게 찾아온 글을 써 내려갔다. 하지만 '꽤 쓸만하다'라는 생각도 결국 나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결정된 것이기에 이 결론은 가끔 틀리기도 했다.
블로그, 브런치 같은 공간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는 가치판단도 더해졌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세상엔 이미 좋은 글이 차고 넘치는 데 굳이 서툰 창작의 흔적물을 남겨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월든>이나 <1984> 같은 양질의 도서를 볼 때나 웹상에서 다른 작가님들의 좋은 글을 볼 때면 공개적으로 올려놓은 내 글들이 왕왕하며 머릿속을 때렸다. 좋아하는 글 읽기마저도 스트레스를 주는 지경까지 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직하게 '글 쓰는' 노동을 감내하는 것은 순전히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은 욕망에서였다. 말 그대로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그 겉치레의 위선을 넘어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의 울림을 어찌 되었건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과 이야기는 불친절하게도 늘 시간이 되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를 하더라도 그저 꾸준히 글 쓰는 수고로움을 감내해보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깜박이는 커서를 마주하고 고민할 수 있다는 것도 브런치에서 글 쓰는 사람의 특권이라 여기기로 했다. 또 한 가지의 감사할 수 있는 건 글을 봐주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온갖 재료를 구해다 부산을 떨며 요리를 하는 사람이 원하는 건 만든 요리를 그 사람 앞에서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 모니터로, 핸드폰 액정으로 잠시나마 일상의 시간을 투자해 글을 바라봐준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기에 더 정직하게 일을 감내하자 마음을 먹었다. 어딘가 현학적인듯한 나의 말투에 대해 썩 마음이 드는 건 아니지만 나름 모색방안을 찾아가고 있다.
첫 시작은 미지의 세계이다.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건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조던 B. 피터슨. 12가지 인생의 법칙) 그런데 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사실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에 달려있다. "난 이걸 이제 할 거야. 시작할 때가 됐어."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실수해도 반복하다 보면 자극의 역치가 낮아진다. 마음의 파동도 잔잔해진다.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시작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점차 습관화가 되어 자극이나 스트레스 없이 그걸 할 수 있게 된다.
습관은 의식의 레이더 바로 밑에 잠복해있다. 습관이 되면 우리는 일일이 생각하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뇌가 일을 덜 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는 것이다. 습관은 에너지를 아끼려는 우리 몸의 지혜다.
톰 콜리 <습관이 답이다>
톰 콜리는 "습관은 에너지를 아끼려는 우리 몸의 지혜"라고 했다. 서툰 것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는 것도 습관인 것처럼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습관이다. 시선을 어느 방향으로 트냐에 따라 익숙함은 이처럼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결국 미지의 두려움은 앎으로 해소가 된다. 따라서 그 끝을 바라봤을 때, 시작 그 자체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더욱 무게를 두고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무엇을" 시작할지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
인생에서 중요한 목표를 발견하면 알게 되겠지만 그것은 심사숙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목표를 발견했는지 의심이 들지도 않을 것이다. 의심이 든다면 목표를 아직 찾지 못한 거라고 확신해도 좋다.... 매일 하게 되는 활동이 있다면 인생의 주요 목표를 발견한 것으로 여겨도 된다. 죽는 날까지 할 거라는 느낌이 오는 일이 바로 주요 목표다.
톰 콜리 <습관이 답이다>
또한 톰 콜리는 <습관이 답이다>에서 인생의 중요한 목표는 머릿속에 문득 떠오를 만큼 이미 저마다의 무의식에 자리 잡혀있다고 이야기한다. 애써 찾을 필요 없이 떠오르는 그것을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라고 해서 꼭 거창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가 안정적이고 남부러워할 직장에 들어갔다고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아니면 좋은 차를 샀다고 해서 곁눈질하며 그것만 바라보고 있을 이유는 없다. 현인의 말마따나 "인기 있는 인생이란 수많은 인생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삶의 방식을 희생하면서 하나의 삶만을 과대평가할 순 없는 것"이다. 그저 두려움이라는 허들을 넘어가기 위해선 그만한 연료가 필요하기에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거다.
마음에 브레이크를 거는 장애물들에 대해서도, 좋아하는 것과 즐길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 보암직하다. 이에 대해선 마치 끼니를 위한 도시락을 갖고 다니듯이 어디든지 꺼내서 펼쳐보는 정성도 필요하다. 분명 걱정과 고민은 다르다. 걱정이 아니라 고민을 해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사고할 수 있다. 그러려면 의식적으로 걱정과 긴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부단히 깨어있어야 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걱정은 그저 끝없는 걱정을 공산품처럼 생산하며 깊은 미지의 수렁으로 우리를 가둬둘 뿐이다. 걱정에 잠식해버리면 마음이 가난해진다. 가난하면 꿈꾸는 것도 하고 싶은 걸 하는 것도 사치로 여기지 그것을 취하기 위해 움직이려고 엄두 내지 못한다. 현실이 어떠하든 앞날에 대한 가능성마저 차단해버리는 건 나 자신에 대한 선행은 분명히 아닌 듯하다. 고민 속에서 팍팍한 삶을 사는 이들(필자를 포함한)에게 월든 호숫가에서 세상과의 독립을 선언했던 28세 젊은이 소로의 고백이 잠시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우리는 지금 믿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안심하고 믿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먹고사는 문제로 너무 끙끙대지 말고 오히려 다른 일에 관심을 돌리면 어떨까. 자연은 인간의 강한 면뿐만 아니라 약한 면도 잘 이해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얼마나 소심한지 가능하면 신념 따위는 잊고 살아가려고 굳게 결심이라도 한 것 같다. 하루 종일 주위만 신경 쓰다가 밤이 되면 마지못해 기도를 올리고 애매모호한 존재에 몸을 맡긴다. 이렇게 우리들은 자신의 생활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거나 변화시키려는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철두철미하게 생활에 쫓기며 살아간다. 이렇게 사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중심점으로부터 수많은 원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삶의 방식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모든 변혁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생활의 변혁은 부단히 일어나고 있는 기적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