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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꽃 Oct 14. 2020

노력: 길에 떨어진 떡을 먹으면 돌을 씹는다

요행을 바라면 꼭 고생하더라

캐리어만 끌고 이사해본 적이 딱 두 번있다. 한 번은 풀옵션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던 때이고 다른 한 번은 독일에서였다.


 심지어 우버를 부르지도 못하고 트렘으로 이동했다. 물론 이렇게 이사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진 못했었다. 집주인에 대한 스트레스에 못 견뎌 계획에 없던 이사를 감행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독일 베를린에 입국한 지 두 달 여만이었다.

  







 손놓았던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불현듯 마음에 불을 지폈고 긴 고민 없이 바로 출국 준비에 돌입했다. 그렇게 처음 한국에서 독일로 공부하러 가기로 마음을 먹고 베를린행 비행기에 올라탈 때까지 걸렸던 시간은 한 달남짓이었다.



 그 한 달 동안 ‘독일행’이라는 목표 아래에 수많은 일들에 매달려야 했다. 수속 밟을 때 지참할 증빙 사본들이나 현지에서 구하기 힘든 한국 생필품까지 신경 쓸 것들이 굉장히 많았다. 여행하러 갈 때마다 늘 긴장하게 만들었던 비행기 티켓팅은 어려운 축에 속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한 때 내 노트북 화면 전체가 포스트잇 ‘스티키’로 뒤덮이기도 했다. 점검할 목록을 적었다가 체크해나갔다. 본래 체크리스트를 하나하나 체크해나가면서 성취감을 느껴하는 편인데, 안심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일감이 생겨나니 쾌감이 들긴커녕 조급했다. 그중 단연 가장 속을 끓인 건 숙소 문제였다.

 

소망의 거울에서 비치는 베를린 원룸

 

나중에 알았지만 베를린에서는 현지인도 집 구하기가 어렵다. 워낙 유동인구도 많은 데다 임대료도 저렴하지 않아 마음에  쏙 드는 집을 찾기가 녹록지 않다. 그래서 가격 괜찮고 합리적인 방을 찾기 위해 세입자는 일대 다수의 ‘집 인터뷰’도 치러야 한다.


“전 이 집에 살기에 딱 적합합니다. 예술적인 감각과 깔끔함의 소유자기 때문입니다.”


제삼자 입장에선 코미디 같은 연출이지만 그 당사자만큼은 자신이 이 집과 얼마나 절묘한 궁합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사 면접 못지않게 열성을 다해 어필한다. 한국에 있을 당시야 당연히 이런 현지 사정을 알 턱이 없었다. 그래도 적어도 기본적인 독일어를 구사하기도 힘든 외국인으로서 집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집을 구하는 데 정한 우선순위는 “얼마나 편하게 집을 구할 수 있느냐”였다. 다른 신경 쓸 것도 많은데 긴 시간을 투자할 순 없어서였다. 그러다 현지 어학원마다 보통 숙소를 중개해주는 시스템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다니기로 정한 어학원에 이메일을 보냈다. 어학원과 멀지 않은 거리로 방을 구할 수 있냐는 나의 물음에 현지 어학원에선 하루 뒤쯤 친절하게 답신을 줬다. 방을 구해줄 수 있고 교통이 편리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오가는 데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반가이 그 제안을 수락했고 그렇게 난 괴롭던 숙소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독일 베를린에 도착했던 건 밤 10시경이었고 약 40분쯤 걸려 숙소에 도착했다. 작은 아파트들이 모여있는 한적한 동네였는데, 공용 주차장과 분리수거장 말고는 빈 공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황량했다. 그리고 키가 굉장히 큰 중년 독일 여성 집주인이 독특한 차림새로 날 맞이해줬다. 정확히 말하면 쿠키몬스터에 얼굴만 뚫려 있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독일인을 처음 대면하기도 하고 게다가 이런 첫 만남이 얼떨떨해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방 인수인계를 받았다. 분명 인수인계에는 큰 요구사항이 없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짐을 푼 그다음 날부터 끊임없는 컴플레인에 시달려야 했다. 완조리형 식품만 먹어라, 가스레인지 사용은 집주인이 없을 때 삼가라, 한국 음식은 금지다 등 다양하고 세세한 규칙들이 매일 새로이 정립되었다. 한 이주쯤 지나자 사실 수도승으로 이곳에 수양하러 온 건 아닐까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중개비까지 어학원에 주고 적지 않은 월세를 내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건가 따지고 싶었으나 이런 불편함을 건의했을 때, 어학원에선 “미리 말한 조건대로지 않냐”고만 답했다.


또 이런 마음을 더 심란하게 한 건 주변 현지인들의 걱정스러운 조언들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를 이야기하면 다들 하나같이 “거긴 나치들이 많이 살아서 인종차별 테러에 유의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별 탈은 없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게 되면 요동치지 않을 리 없었다. 한 번은 간밤의 ‘축제’로 집 앞 주차장의 차들이 열 대 넘게 부서진 적도 있으니 이런 말들도 공연한 노파심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집주인 가족들과 소소한 정을 나누면서 적응을 해나갔다. 집주인은 이따금 내 방으로 따뜻한 차와 쿠키도 가져다주며 대화하기를 즐겼다. 그런 정이 쌓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광야 같은 베를린 바닥에서 집 구할 자신은 도저히 없었기에 현실에 만족하며 버텨나갔다.


 그러다 ‘불닭볶음면’으로 이 불안정하면서 따뜻한 셰어 홈 생활의 막을 내렸다.


 

문제의 불닭볶음면과 가출한 당일의 베를린광장


 집주인이 긴 외출을 한 날이었다. 학업 스트레스로 온 몸에 화가 쌓여있었던 터였다. 수업의 80%를 못 알아듣고 와서 스스로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집주인도 없겠다, 서둘러 감춰왔던 불닭볶음면을 개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대대적인 작전은 불시에 들어온 집주인과 맞닥뜨리면서 허무하게 마무리됐다. 연신 코를 막으면서 온 집안에 탈취제를 뿌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없이 방에 들어와 캐리어에 짐을 담기 시작했다. 두 달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내가 캐리어를 끌고 향한 곳은 어학원에서 알게 된 한국인 동생 집이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 동생은 곧 방을 뺄 생각이었고 집주인은 그다음 날 공교롭게 함부르크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어학원에서 중개해준 첫 숙소를 떠나 새 집으로 무사히 이사했다.






 자유로운 두 번째 집으로 오기까지의 험난한 과정들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듯하다. 회상의 유익한 점 중 하나는 피곤하고 잡다한 기억을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야 어학원에서 중개해주는 숙소는(좋은 사례들도 물론 있으나) 이런 사례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걸 들었다. 잘 모르고 어수룩한 외국인 유학생들만큼 좋은 고객도 몇 없기 마련이다. 이 돌발적인 이사를 통해 “세상엔 공짜는 없다”는 공정한 인생의 교훈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머리론 알고 있어도 직접 부딪혀봐야 그걸 진지하게 터득하는 게 보편적인 사람의 습성 같다. 그저 마음의 조급함에 속아 내 몸 편히 뉘일 공간을 찾으려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만한 대가를 치렀다. 길가에 떨어진 떡을 섣불리 먹으면 돌을 씹을 수도 있다.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도 않고 덥석 그걸 삼키는 건 오로지 “요행”을 바라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욕심이 눈을 멀게 하는 거다.




“저녁엔 의자를 사지 마라”는 유태인 속담이 있다. 다리가 아픈 저녁이면 모든 의자가 편해 보이니 유의하라는 말이다. 마음이 조급하고 어려울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편하게 만들어줄 유혹거리가 곳곳에서 찾아올 수 있다.



최근에 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구절을 보았다.



때로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길이 사실은 우회 로고, 우회로라고 생각하는 길이 실제로는 지름길이다. 당장 편하자고 당장 좋아 보인다고 당장 탐난다고 욕심내다가는 애초의 목적지와 멀어지는 수가 있다.... 오히려 우직하게 정도를 걷는 게 역발상이다.”

강상구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때론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길이 우회로다. 되려 더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답인걸 알면서도 묵묵하게 정도를 걷는 건 역시나 쉽지 않다. 감당해야 할 수고가 눈에 선하니까 피하고도 싶다. 사실 피할 수만 있다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은 장애물 넘어가듯 건너뛰고 싶지만 그게 허용되는 때는 거의 없다.

 그래도 정당하게 노력해서 누리는 대가만큼은 그 자체로도 큰 자산이고 가치임에 분명하다. 그저 지금 정직하게 걷는 그 길이 제일 빠른 길이라고 다독이며 간다면 조금의 위로는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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