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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꽃 Oct 11. 2020

휴식: 힘들어? 쉬었다 가

남에겐 해도 나에겐 쉽게 하지 못하는 말





 일정을 확 줄였다. 몇 달을 생각해왔던 일임에도 실행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오래 고민했던 탓이다. 도맡아서 가르치던 학생이 있었는데, 프리랜서 업무 상 갑작스럽게 근무 시간이 다른 쪽에서 늘어나 병행이 어려워졌었다. 학생을 만나러 가는 이동 시간이나 밥때를 따지면 진즉에 정리했어야 하는 게 맞았지만 이럴 때마다 발동하는 병이 있으니 바로 일명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아"병이었다. 왜인지 내가 손을 놓으면 상대에게도 큰 민폐를 끼칠 것 같아 스스로 의미 없는 희생을 자처하는 병인데, 종종 도지곤 한다.



 한 번은 이전에 일했던 곳에서 이런 마인드 때문에 혼난 적도 있다. 마찬가지로 가르치던 학생들이 눈에 밟혀서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데 입이 떼지지 않았다. 그러자 담당 사수가 "학생이 대신 인생을 살아주는 게 아닌데 왜 냉정하게 생각하지 못하냐."라고 일침을 했다. 아무리 학생과 나 사이의 라포(rapport)가 형성되었어도 한쪽에서 그만둬야 하는 순간이 오면 쿨하게 보내주는 게 맞다. 말 그대로 그 학생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면서, 지금의 유예 기간을 대신 뛰어주는 것도 아니며 앞으로의 인생 방향에 책임져주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그 학생의 길을 대신 선택해주고 걸어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사람이 되었든 일이 되었든 나의 땀과 정성이 깃든 곳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마음으로는 쿨하고 싶어도 정신 차려보면 질척이고 있을 때가 다반사이다. 그만큼 이별이나 정리가 간단치 않다. 헤어짐을 고하는 용기가 없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마음으론 정리했어도 입은 안 떨어져서 겉껍데기만 남아 의미 없는 일을 자처해서 하곤 했다. 이걸 고치려면 우선은 죽 끓듯 끓며, 언제나 모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는 이 변덕스러움을 인정해야 하는데 나는 나의 이런 면이 늘 영 어색하다. 그래서 꾹 버티고 우직하게 밀고 나갈 때가 많다. 그런 모습을 좋게 봐주는 사람들도 주변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리해야 할 때를 만나서 그 일을 정리하고야 만다.






 사실 "나 아니면 안 돼."병은 일종의 자기기만임을 알고 있다. 어릴 적엔 그저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성격의 일부겠거니 생각했었는데 머리가 크면서 이 마인드 자체가 어떤 면에선 기만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고 나의 생각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상대도 상대 나름의 계획을 세워나가면 될 터이고 어쩌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가정조차 염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버티면 버텨질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항상 우리의 몸은 마음의 생각을 읽고 신호를 보낸다. 힘들면 힘들다고, 쉬고 싶으면 쉬고 싶다고 마음이 몸에게 신호를 보내면 몸은 자가치료에 들어가면서 이상 증상을 보인다. 졸음이 쏟아지거나 근육통이 심해지거나 두통이 갑자기 찾아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나뿐 아니라 몸이 사소하게 이상신호를 보내도 이걸 섬세하게 잡아내고 조치하는 사람을 사실 여태껏 많이 본 적이 없다. 또 다른 학생을 만나서 수업을 하는데, 팔 쪽을 계속 불편해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팔에 염좌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병원은 딱히 가지 않아도 될 것 같고 그냥 본인이 조심해서 팔에 무리가지 않게끔 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또 아는 사람 한 명은 허리가 아파서 근육통 약을 아예 사 먹으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고 있었다. 직장일도 하고 여러 신경 쓸 일이 많아서 병원 갈 시간을 굳이 못 내겠다는 게 이유였다. 그밖에도 주변 어느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던 그런 식이었다. "조금만 조심하면 돼.", "별 건 아니니까." 라며 흐지부지하게 자신의 그다지 건강치 못한 상태에 대해 말끝을 흐린다.



 그럴때 마다 난 그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내게 했던 말들을 머릿속으로 회상하곤 한다. 머리가 아팠다, 잠이 통 안 왔다 등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았다고 이야기했을 적에 분명 이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적당히 하고 쉬어라.", "많이 아프면 병원을 가라."라고 걱정스레 말해줬다. 그랬었던 이들도 정작 본인 상황이 되면 새삼 엄격해져 스스로에게 잣대를 들이민다. 이 정도는 자주 겪어봤다는 식이다. 분명 이들도 나처럼 내면의 감찰자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리라 짐작된다.



주변 사람을 생각해주는 그런 마음으로 나 자신을 생각해준다면 조금은 더 여유있을 것이라 생각이 문득 들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몸과 의식은 아주 깊은 연관이 있어서 우리는 우리 몸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불교 명상가 타라 브랙은 삶의 근본적인 수용은 몸의 근본적인 욕구를 알아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했다.




근본적 수용을 삶에 적용하는 건, 우리 몸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감각을 의식하는 것과 같이 가장 기본적 수준에서 시작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가능한 한 당신의 삶이 흐르는, 물길 가까이에 살라."라고 썼다. 내 몸을 알아차림 하며 살게 되면서 습관적 반응의 뿌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두려움과 슬픔을 만들어내는 불쾌한 감각을 회피하고 있었다. 마음 챙김으로 감각의 움직임에 마음을 열자, 분노와 스토리에 의한 통제가 자연스럽게 느슨해졌다.

...
우리 삶에는 참을 수 없는 신체적, 정서적 고통으로부터 움츠려 피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시기가 있지만, 그 고통이 저장된 몸의 부위와 우리의 의식이 다시 연결될 때 치유가 일어난다. 우리가 아무리 깊이 상처를 받았어도 우리 몸으로, 온전함으로 돌아오라고 부르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여행은 시작된다.


타라 브랙 <받아들임>




힘들면 쉬었다 가도 돼.


    



누군가에게 들으면 위로가 되는 그 말을 왜 나 자신에게는 그토록 아끼는 걸까. 어쩌다 노랫말로 스쳐 지나가듯 듣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이따금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눈물마저 핑 돈다. 힘들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하면서 가야 하는 삶에 진심으로 힘이 되는 말이다. 힘들면 쉬었다 가도 된다. 맞는 말이다. 저 옛날 논어에 "三日之程 一日往 十日臥"라는 말이 있다. "사흘 길 하루 만에 가서 열흘 앓아눕는다"는 뜻이다. 지쳤어도 인내하면서 가는 건 인정받아 마땅한 모습이나 늘 그럴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 묵묵히 버티면서 가기엔 앞으로도 견뎌내야 할 변수가 많지 않은가. 벌어질 일들에 대비하여 현재의 힘은 약 70%만 사용하라는 자기 계발 서적의 한 부분이 떠오른다. 딱 나의 70%만 소모하는 건 어떨까. 핸드폰 배터리도 방전되기 전에 충전하는데, "쉬었다 가자"는 말이 고생하는 나 자신에게 못할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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