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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꽃 Sep 12. 2020

커피: 커피가 주는 위로의 힘

커피는 죄가 없다, 커피 예찬 에세이

 





 4주에 한번 정도 1L 용량 콜드 브루를 두통씩 산다. 거기다 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편의점용 라떼 음료까지 냉장고에 가득 채우고 나면 참 든든하다. 이번 달도 열심히 살아보자는 일종의 결의다.


 

생수와 함께 냉장고 지분을 담당하고 있다.


줄곧 고소한 맛이 나는 브라질 산토스만 마셨었다. 그러다 최근 들어 단맛과 약간의 신맛이 가미된 콜롬비아 수프리모로 도전해보았다. 초콜릿 계열의 무거운 향과 함께 산미가 살짝 입에서 맴도는데 입맛에 썩 맞았다.


 난 어릴 때부터 신맛을 질색했다. 어쩌다 가끔 신 게 먹고 싶을 때  투명한 가루가 엉겨 붙어있는 과일맛 젤리를 먹는 정도다. 그런데 이 '산미'가 풍미와 함께 어울리니 꽤 괜찮아 내심 놀랐다. 이렇듯 이따금씩 나의 취향을 새롭게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 이런 거 좋아하네?"하고 이 일상의 발견들을 기꺼이 맞이해준다.


 

스타벅* 바닐라크림 콜드 브루

 자주 먹는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 콜드 브루 같은 블랙커피 종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바닐라크림 콜드 브루이다. 바닐라 라떼의 묵직한 단맛을 중후한 콜드 브루 향이 잡아줘서 '진지한' 단맛이 난다. 단맛을 먹고 난 후 특유의 텁텁함도 덜해서 프랜차이즈 커피점에 가면 자주 먹는다.


문제의 텀블러


 요즘 작은 변화가 하나 더 있는데, 하루에 마시는 커피양이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사하면서 함께 사들인 '1+1 대용량' 텀블러가 문제였다. 얼음을 가득 넣어도 부족함이 없고 가성비가 좋은 이 텀블러의 용량은 자그마치 '900ml'에 달한다. 900ml 컵을 쓰니 한번 담을 때도 900ml 커피를 담게 된다. 대개는 다 먹지 못하고 덜 녹은 얼음과 함께 비워버리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만큼 커피 먹는 횟수도 양도 더 늘었다.


 무엇이든 담는 그릇에 따라 양은 바뀌기 마련이다. 몇 년 전 6개월 간 일본에서 잠시 살았었다. 새 집으로 이제 막 이사를 한터라(그때도!) 식기를 장만했는데 정신없는 참에 밥그릇은 깜빡하고 국그릇만 여러 개 사버렸다. '크게 다르겠어?'라며 무심하게 얼마 간 국그릇을 밥그릇 대용으로 썼다. 그리고 그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몰라보게 살이 오르고 말았다. 담는 양에 따라 우리 뇌는 그 양이 적합하다고 인식을 해버린다고 한다. 즉, 그때 나의 뇌도 '한 그릇만큼 먹는다.'는 명령어를 적극적으로 내려 밥양마저 밥그릇에서 국그릇으로 늘려버린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밥그릇에 밥을 푸고 커피잔에 커피를 담아내는 아주 작은 일상 속에서도 우리 뇌와 몸은 결코 쉬지 않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신경세포들은 오로지 유일한 소유주의 전유물로써 매 순간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은 밥이 아닌 커피를 국그릇으로 마시는 기묘한 광경을 본 적도 있다. 독일 시내 레스토랑에 가서 이른 점심을 먹었던 날이다. 샐러드바 형식으로 각종 시리얼과 잼, 소시지, 스크램블 에그 등이 즐비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음료는 따로 주문해야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까만 커피가 (수프를 담는 용도로 쳐도) 꽤 큰 수프 그릇에 담겨 나왔다. 내색은 안 했지만 아주 당황한 나와 달리 커피 주인은 그 커피를 고고하게 두 손으로 들고 마셨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사약을 받아 사발로 마시는 사극의 한 장면이 겹쳐졌다. 베를린 한 브런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독일인에게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던 이질감이었다.



 커피를 국그릇에 마시진 않지만 직장 생활하면 늘어나는 게 술잔과 커피 샷이더라, 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상에서 커피를 즐기고 나아가 커피로 버티는 사람도 점점 늘어난다. 많은 이들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커피로 피로를 깨우고 카페인의 힘을 빌어 출근길로 향한다. 더울 땐 아이스커피로 더위의 짜증을 삭히고 추울 땐 따뜻한 카페모카로 언 속과 손을 녹이기도 한다. 커피는 어느새 자발적 프롤레타리아의 생필품이 되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자연스레 커피 한 모금 마시면서 여유를 갖는다. 어떤 복잡한 생각이 머리에 있던, 커피는 입에 머금는 동시에 말초신경을 위로해준다. 일종의 명상처럼, 일상의 고통 속에서 우리를 잠시 고요히 사색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현대인의 전유물과 같이 취급되는 커피의 '위로의 힘'은 사실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왔다.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는 백작부인과의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했고, 결혼비용 마련을 위해 밤샘 작업을 감당해야만 했다. 발자크가 원고 집필을 위해 하루에 마신 커피만 자그마치 40잔이었는데 평생 통틀어 50만 잔의 커피를 마셨다. 수도승들도 수행 동안에 졸지 않기 위해서 커피를 마셨다. 베토벤 역시 커피 마니아였는데, 직접 추출기를 손수 만들 만큼 커피를 사랑했다.





 작품 중 90%가 종교음악인 바흐 역시 커피 예찬자였고 몇 안 되는 세속 음악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커피 칸타타'(Coffee Cantata BWV 211)이다.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찬송하기 위해 작곡된 음악이니, 일종의 커피 cm송인 것이다.


 "Ei! Wie schmeckt der Kaffee süsse!"
아! 커피맛이 얼마나 꿀맛인가!

  


10곡이 진행되는 동안 가수는 줄곧 커피를 예찬한다. 이 달콤한 음료가 주는 카페인의 힘이 어떤 면에선 '성숙한 절제'와 거리가 멀어 보였기에 커피 마시기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일부 존재했었다. 커피 칸타타의 주인공도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하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커피를 끊는다고 약속한 후에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 몰래 신랑을 찾아가 '커피 섭취 자유' 조항을 받아낸다. 카페인이 주는 묘한 효험은 언뜻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커피엔 죄가 없다.

 16세기, 유럽 가톨릭 신자들은 커피를 경계했다. 그래서 이 '악마처럼 달콤한 이교도의 음료'를 금지해달라고 교황에게 청원을 했다. 열화 같은 청원으로 안 마시던 커피를 공적으로 맛 본 교황은 그 맛에 반해 도리어 커피에 세례를 주고 음료로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처럼 커피는 신성함까지 인정받으며 그 마력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고 지켜져 왔다.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주는 순수한 위로의 힘과 에너지는 일상을 살아가는 데 큰 활력소가 된다. 특히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카페에 앉아있는 그 시간은 우리에게 참 소중하다. 반가운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약속 시간 전 애매한 시간을 메꾸기도 하며, 혼자 공부를 하기도 한다. 이처럼 카페 역시 커피 못지않게 의미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어느 때엔 잔잔한 음악이 동반되는 치유와 위로의 현장이 되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통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달고 따뜻한 커피 냄새와 케이크, 좋은 음악과 조명을 즐기면서 일상의 불안에서 해방이 되고 한결 여유로워진다.


 팍팍하기도 하고 불안정한 지금이지만 여유롭고 따뜻하게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을 때가 분명 다시 찾아올 것이다. 이미 하나의 일상처럼 우리에게 스며든 커피와 카페는 단순한 기호품 이상의 즐거움과 위로를 우리에게 건네준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흐르는 커피 칸타타의 선율에 귀 기울이며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다가올 하루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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