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원을 위한 Soft Landing을 위해서였을까? 텍사스 주재원으로 오기 직전 4개월 동안은 거의 절반 정도를 텍사스 오스틴으로 출장을 오게 되었다. 말이 좋아 오스틴이지 LS일렉트릭의 배스트럽 캠퍼스는 오스틴에서 제법 멀다. 오스틴에서 무려 편도로 80km가 떨어진 곳이라 처음에는 출퇴근에 대한 부담감도 상당했다. 부임 직전 빈번했던 출장에서 일본차, 미국차, 독일차 등등 여러 자동차를 렌트해 보다가 어느순간 한국의 현대차 투싼이 걸렸다. 그때 회사 직원 한분이 내 차를 얻어 타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투싼? 이거 너무 싸서 투싼 아니야?”
농담조라 그땐 그냥 웃어넘겼다. 이게 인연이라면 인연이었을까? 그 Soft Landing 이후에 나는 내 출퇴근 차로 투싼을 구입하였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지만, 결론은 투싼이 나에게 가장 편했다. 애국심 있는 사람까지는 아니지만 35년이 넘는 나의 한국인 정체성으로는 스마트 크루즈 기능 없이는 왕복 160km 출퇴근을 할 수가 없었다. 가장 나의 손에 익숙한 게 투싼이었고 실내 구조도 가장 편안했으며 그 회사 직원 말씀처럼 가성비를 철저히 따지는 한국인에게 적합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20시간이 넘는 이 텍사스 땅에 와서 주재원 생활을 하지만 내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관성의 법칙처럼 나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 공장장으로 출퇴근을 4개월 넘게 하다보니 어느새 식구들도 많이 늘어났다. 아무래도 여기는 미국이지만 한국에서 설립한 공장이다 보니 미국 국적의 한국인들도 많이 보인다. 나 같은 한국 국적의 토종 한국인도 있지만 미국에서 자라난 미국 국적의 한국인들도 많다. 서로 문화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첨예하게 다르지만, 이들이 하나로 묶이는 것은 음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스틴의 한국 마트인 H마트로 가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인다. H마트의 원래 이름인 한아름마트의 뜻처럼 한국에서 자랐든, 미국에서 자랐든 한데 어울려서 다 같이 포근히 안아주는 모습이 보인다. 그 안에서는 이미 인종의 벽을 뛰어넘어서 누구든 다 포용해 주는 한아름을 볼 수가 있다.
추석이 다가오니 나름 공장장으로서 직원들에게 뭐라도 하나 이벤트를 해주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딱 맞는 것이 바로 H마트였다. H마트 어원처럼 송편을 한아름 사서 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송편이라는 전통적인 음식 앞에서 이미 우리는 한국인이 되었다. 그렇게 텍사스라는 이 낯선 땅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한아름 얹어보면서 공장을 더 튼튼하게 만들어보고 싶다.
이런 한국인들이 일하는 곳이 항상 다 한국다울 수는 없다. 엄연히 이곳은 텍사스 한복판에 위치한 오스틴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텍사스에 출장 온 직원분들, 타 주에서 건너온 고객분들에게 소개해 주는 요리는 텍사스 바베큐, 그중에서도 브리스킷이다. 브리스킷은 보통 텍사스처럼 뜨거운 온도와 오랜 시간이 필요 하므로 끈기와 인내로 만들어지는 요리로 유명하다. 브리스킷 가게마다 12~16시간씩 기본 조리 시간이 소요되며 저온 장시간 조리가 풍미 있는 브리스킷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떤 가게는 조리 시간을 더 길게 늘여서 일주일에 하루 장사하는 곳도 있고 그런 곳에서도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가게마다 특징도 뚜렷하고 그 맛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브리스킷이 제아무리 조리가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도 텍사스 사람들은 끝까지 조리를 해내고 그 맛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항상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인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장 내의 텍산(Texan) 직원들의 행동을 보면 한국인들처럼 빨리하진 않더라도 장시간 동안 단계적으로 일하면서 그 시간 속에 창의성이 발휘되는 걸 발견할 수 있다. 항상 체력과 집중력이 일관되게 유지되면서 중간중간 브레인스토밍을 해주면서 스스로 더 나은 방향을 찾아낸다. 목표만을 위해 최단 거리를 찾으려고만 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배워야 할 점 아닌가 싶다. 이런 텍사스만의 탐구를 LS일렉트릭과 미국에서 접목할 수 있다면 분명 큰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LS일렉트릭의 배스트럽 공장에서는 투싼 같은 기능 최적화, H마트 같은 포용력, 브리스킷 같은 끈기가 각자 공존하며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투싼은 나와 같은 한국 출생의 한국인 주재원 같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한국만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미국에서도 이렇게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하려고 하는 모습이 마치 나와 닮은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이 차를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H마트는 미국 국적의 한국인 같다. H마트의 한아름이라는 말처럼 그 어떤 한국인들도 다 한국답게 포용해 주는 이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사랑해 주는건 비단 한국만이 아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방문하여 한국다운 것을 즐기는 모습이 바로 H마트이고 우리 LS일렉트릭에서 일하는 한국 현지 채용 직원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텍사스 바베큐는 그 이름대로 텍산 그 자체이다. 텍사스의 뜨거움과 거대함이 한데 어우러져 장시간이 걸려야 완성될 수 있는 텍사스 바베큐처럼 텍사스 사람들에게도 특유의 끈기와 의지가 엿보인다. 또한 공동체와의 유대감을 중요시하는 문화로 완성된 텍사스 바베큐처럼 우리 공장의 텍사스 직원들도 한국인인 나와의 친밀감을 유지해주며 항상 급하게 몰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여유와 창의성을 한 스푼씩 얹어주고 있다.
미국에서의 삶은 하루하루가 다양성 그 자체이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다양함들이 혼재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시너지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이 다양성이 굳이 하나로 엮어질 필요는 없다. 요즘에는 다양한 것을 하나로 만드는 멜팅팟(Melting Pot)보다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시너지를 만들어주는 샐러드 볼(Salad Bowl)이 되는 게 미국이 가야 할 방향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다. 나도 다양한 사람들과 일을 해보며 이들을 굳이 어거지로 하나를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이 다양성을 각자 살려서 조화로운 샐러드 볼을 만들면 될 것이다. 굳이 하나로 엮는다면 LS일렉트릭의 상징인 전기라는 샐러드드레싱 정도 얹으면 좋겠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전기는 어디서나 쓰는 것이니 이걸로만 하나 되면 충분할 것 같다. 이런 다양성을 잘 살려줄 수 있는 맛난 드레싱 같은 주재원으로 텍사스 공장을 키워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