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연말, 어느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저는 엄마의 요양원이 있는 시골 마을에서 부모님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던 중이었지요. 불쑥 아빠가 말을 꺼냈습니다. "너희도 이제 결혼해야지" 그러자 엄마도 말을 보탰습니다. 내년 3월이 어떻겠느냐고, 되도록 빨리 결혼식을 올렸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월리가 병을 앓은 이후로 부모님이 결혼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지요. 놀라고 기쁜 것도 잠시, 불안함이 엄습했습니다. 투병 1년 만에 벌써 뼈마디가 앙상해진 엄마였지요. 그런 엄마가 더 나빠지기 전에 결혼을 서두르는 걸까봐 속없이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혼식 전날 밤, 엄마의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진작 허락했어야 했는데, 부질없이 세월만 흘려보내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런 엄마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알콩달콩 재밌게 지냈으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어느새 4년이 훌쩍 지나 있었지요. 2018년 4월 7일, 우리는 소박하고 따뜻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여든 명의 고마운 벗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엄마의 요양원이 있던 작은 소도시까지 와주었지요. 예식장을 활보하며 하객을 맞는 저를 보고는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지만, 조신히 앉아 있다가 수줍게 버진로드를 행진하는 것은 아무래도 저답지 않는다는 걸 그들도 아는 눈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행진 없이 우리만의 방식으로 결혼 서약을 하고, 직접 만든 엉성한 동영상 을 본 다음, 다함께 느긋한 식사를 즐겼지요. 마을 잔치같은 그 공기가 참 좋았습니다.
예식촬영을 맡은 사진관 아저씨는 예쁘게 찍어주마 하시며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한 달 뒤에 받아본 앨범에는 우리 인생에 다시 없을 촌스러움이 가득했습니다. 카메라 플래시에 번들거리는 우리 둘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던지요. 결혼식 사진을 궁금해하던 지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 앨범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하객들의 얼굴도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시 없을 강렬한 결혼 선물이었습니다.
2018년 4월 25일, 6개월만에 만난 신경외과 주치의가 말했습니다. "이 부분 보이시죠? 제가 감마나이프 선생님을 연결해드릴 테니까 수술 받으세요" 영문을 몰라 눈만 꿈뻑거리니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여기 안 보이세요? 재발했잖아요" 누군가 머리를 쇠방망이로 내려친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참 잘 이겨냈다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서로를 토닥였던 것이 불과 보름 전이었지요. 그런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한다니요. 우리는 그 모든 일을 다시 겪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는 감마나이프라는 방사선 수술을 권했습니다. 개두술을 다시 하기에는 성공 확률도 낮을 뿐더러 심한 후유증이 예상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두 선택지 모두 우리에게는 미봉책처럼 느껴졌습니다. 개두술로 종양을 제거한더라도 지금처럼 재발할 가능성이 높았고, 감마나이프로는 종양을 소멸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했기 때문이지요. 남은 우리 인생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선택은 다시 없을 것 같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여러 저명한 의사들에게 소견을 구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각기 다른 수술방법을 권했지요. 그 중에는 감마나이프는 월리에게 치명적이라며 극구 만류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답을 구하러 나섰다가 물음표만 잔뜩 얻고 돌아온 기분이었지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엇이 최선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목숨이 달린 결정을 확신도 없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밤잠을 설치며 몇 날 며칠간 고민한 끝에 우리는 어떤 종양 제거술도 받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월리와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이었지요. 당장 종양을 없애지 않으면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매순간 엄습했고, 달리 마땅한 치료법도 없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이 정해놓은 답을 따르는 대신 근본적인 치료 방법을 찾기로 했습니다. 물론 선택에 따른 결과도 우리가 감당할 몫이었지요. 그렇게 우리는 지도에는 없는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