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6일 저녁,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 안 보고 싶어?" 묻는 어머니께, 월리는 "내일 갈게요, 엄니" 하고 대답했지요. 그러나 모자는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의식 불명 상태로 발견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이 늦도록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아주버님이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주무시던 모습 그대로 누워계셨습니다. 뇌졸중이었지요.
40대 중반에 남편을 간암으로 떠나보낸 어머니는 평생 아들 둘만 바라보며 칠순까지 청소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겨우 편안한 노년을 보내실 수 있게 되었을 때, 월리가 뇌종양 진단을 받고 말았지요. 한 달이 넘는 입원기간 동안, 어머니는 1시간 30분 거리의 먼 길을 마다 않고 매일 병원에 오셨습니다. 어느 날에는 비빔국수가 먹고 싶다는 월리를 위해 냄비와 버너, 체, 갖은 양념까지 가져와 뚝딱 국수를 말아주셨지요.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다 가져오셨냐고 깜짝 놀라는 제게, 어머니는 덤덤하게 별 일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픈 아들 앞에서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을 만큼 단단한 분이셨지만, 저는 보았지요. 고통스러워하는 월리의 머리를 쓸어주며 "나으려고 아픈 거야" 하시던 어머니 눈이 그렁그렁하던 것을요. 실명한 월리가 더듬더듬 병실을 걸어나갈 때, 몰래 뒤따라 걸으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에 애처로움이 묻어나던 것을 말입니다. 그런 어머니를 허망하게 보낼 수 없었던 우리는 어머니를 서울에서 제일 큰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해볼 수 있는 마지막 치료라던 저체온요법을 시도했지요. 온 몸에 아이스팩을 붙이고 입술이 시퍼렇게 질린 어머니를 보면 가슴이 미어졌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어머니가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11월 20일 저녁 6시, 다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뇌사가 확실해졌으니 이제는 보내드려야 할 것 같다는 담당의사의 전화였지요. 그리 평탄하지 않았던 삶에도 신세한탄 한 번 없이 묵묵히 살아오신 어머니는 그렇게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어머니를 잃은 월리는 우산없이 장대비 속에 서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고아가 된다지만, 19살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그에게 어머니는 너무나 애틋하고 큰 존재였지요. 월리는 그날 밤, 보고 싶다던 어머니께 바로 달려가지 못한 것을 매일 후회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마음고생만 시킨 못난 자식이라는 자책감도 두고두고 월리를 짓눌렀지요. 그런 마음을 다 알면서도저는 어머니께 월리의 병을 가져가달라는 염치없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돌아가신 지 한 달이 되던 날, 월리는 꿈에서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 도착해서 반가운 사람들도 만났으니, 내 걱정 말고 너희들 잘 살라고 말씀하셨다지요. 전화기 너머에선 마을 잔치라도 열린 듯 북적북적한 소리도 들렸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막내 아들이 내내 힘겨워할 것을 다 아셨던 거겠지요. 오래 아파하지 말라고 꿈 속까지 찾아오신 것을 보면서, 부모 속에는 부처가 들어있다던 옛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월리는 언제나 어머니의 자랑이었습니다. 넉넉치 않은 형편 탓에 부모 손을 떠나 외할머니 품에서 자라면서도 투정 한번 부린 적 없던 순둥이였고, 무뚝뚝한 아버지와 형 대신 살가운 애교를 부리던 딸이었으며, 번듯한 학원 한번 보내주지 못해도 명문대에 진학해준 고마운 아들이었으며, 바쁜 회사생활에도 매주 엄마를 만나러 오던 효자였지요. 그런 월리가 운명에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어머니의 자랑으로 사는 것. 어머니가 사랑하는 막내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아마도 그것 하나 뿐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