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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락재 Oct 24. 2021

작별

2018년 가을, 암 덩어리가 커져갈수록 엄마의 몸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올해를 넘기기가 버겁다는 엄마의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짓눌리는 것 같았지요. 11월, 저는 회사를 그만 두고 엄마의 간병을 시작했습니다. 일주일간 엄마 곁을 지키다가 잠시 서울에 들르면, 그날 밤 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통증을 견디기 힘들다는 토로였지요. 그러면 저는 그 밤을 뜬 눈으로 보내고, 동이 트자마자 엄마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릅니다.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엄마였습니다. 그런 엄마가 곁을 비우기가 무섭게 아픔을 호소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과 두려움에 시달렸다는 뜻이겠지요.

엄마는 갈수록 야위어갔고, 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였습니다. 피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어른 주먹만한 종양에서는 쉴새없이 고름이 쏟아져나왔지요. 이 한 문장을 쓰기 위해 가쁜 숨을 여러 번 내쉬어야할 만큼, 아직도 제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종양의 고름을 닦아낼 때, 엄마는 이 징그러운 걸 보고도 도망가지 않아줘서 고맙다 했었습니다. 엄마 몸인데 뭐가 징그럽냐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이 끔찍한 것이  자라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엄마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가혹했던 겨울이 지나고 다음 해, 우리는 엄마를 조용한 시골 마을로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엄마가 암환우들과 단체 생활을 한 지 벌써 2년이 훌쩍 지나 있었지요. 엄마는 새로운 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다시 건강해질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2019년 4월, 시골집으로 이사한 엄마와 저는 낯선 동네를 천천히 구경하고, 인적없는 오솔길에서 찔레꽃 향기에 감탄하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하루하루가 소중했지요.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누리지 못할 행복인 줄 알았더라면 더 많이 감사하고, 더 기쁘게 보낼 것을 그랬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가던 엄마는 결국 시골집에 온 지 2개월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친구들과 맞절을 하는 순간, 비로소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실감했지요. 평생 마음 고생만 하다가 예순넷 이른 나이에 떠난 엄마가 가여워서 억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순간 엄마 생각이 났지요. 눈을 감으면 엄마가 계시던 요양원이 보였습니다. 방문을 열면 엄마가 저를 반기던 모습까지 생생했지요. 그 곳에 가면 엄마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엄마의 흔적에 매달리던 저와 달리, 아빠는 엄마의 남은 옷가지와 화장품을 정리하고 싶어했습니다. 볼 때마다 엄마가 떠올라 괴로웠을 테지요. 그런 아빠에게 저는 엄마가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정리를 하느냐고 화를 쏟아냈습니다. 그것마저 없어지면 엄마가 아주 없었던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그 무렵 저는 심장이 죄어드는 듯한 답답함에 매일 가슴을 치면서 살았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었다면 신이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을까, 내 노력이 부족해서 엄마를 살리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늘 저를 짓눌렀습니다. 엄마를 위해서 기도라도 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물이라도 쏟아야 살 것 같았지요. 그래서 매일 텅빈 법당에서 눈물로 엄마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절을 하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붙잡는다고 붙잡아지나. 왜 소용없는 짓을 하느라 스스로를 괴롭히나' 문득 엄마를 보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제 모습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 같이 느껴졌습니다. 미련한 제 모습이 딱해서 한없이 울었지요. 그렇게 다 쏟아내고 나니,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년이 지나도록 고집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언젠가 한 TV 프로그램에서 초등학교 앞 문방구 할아버지의 부음을 전하며, 아이들에게 죽음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러자 “이 땅에서 할 일을 끝낸 거요” 라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문방구 할아버지는 할 일을 다 끝내신 것 같으냐고 다시 물으니,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네, 충분히”라고 말입니다. 아이들의 말처럼, 이제는 엄마가 이 땅에서의 역할을 끝마치고 먼 길을 떠났음을 이해합니다. 비록 이번 삶이 고되고 버거운 날들이었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기꺼이 겪어내셨겠지요.

눈물없이도 엄마를 부를 수 있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시간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지혜로운 이는 금세 받아들였을 엄마의 죽음이 제게는 많은 공부가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도 그 공부 끝에 조금은 생과 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이 또한 엄마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 마지막 순간이 언젠가 월리와 저에게도 오겠지요. 생이 다하는 그 순간,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잘 살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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