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산수유나무 한 그루도 있었다. 그들은 같은 마을에서 지내며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비가 올 때면 버드나무는 작고 연약한 산수유나무를 위해 두 팔을 벌려 산수유나무를 가려주었다. 산수유나무는 그에 고마움이라도 표현하듯이 저 자신의 빨갛고 달콤한 열매를 버드나무에게 건네주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게 제일 좋은 거 야'라며 열매를 건네던 산수유나무의 모습을 버드나무는 결코 잊지 못한다. 버드나무는 처음 받았던 열매를 자기 잎사귀에 감싸 고이 보관했다. 그 열매가 너무 아까워 차마 자신의 입으로 가져갈 수가 없었다. 버드나무와 산수유나무는 서로에게 둘도 없는 존재였다.
"얘, 산수유나무야. 어디 아픈 거니." 버드나무가 산수유나무에게 물었다.
"응, 버드나무야. 이상하게 자꾸 힘이 없네."
버드나무는 애가 탔다. 이 전처럼 비가 와서 감기라도 걸린 걸까. 아니다. 갈내음이 물씬 풍기는 가을 날씨였다. 바람은 신선했고 땅은 비옥했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기에 이보다 좋은 환경은 없었다. 그 정도로 완벽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버드나무는 더더욱 애가 탔다. 산수유나무가 왜 아픈 걸까. 당최 답을 알 수 없던 버드나무가 엄마 나무인 대나무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 산수유나무가 아파요. 제 동생 산수유나무가 많이 아파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요."
"아가, 버드나무야. 우리는 산수유나무를 지켜줘야 해."
"지키는 건 어떤 거예요. 지키면 산수유나무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나요."
"내가 너를 지켰듯이 너도 산수유나무를 지켜주렴."
엄마 대나무는 자식 버드나무를 어떻게 지켰을까. 대나무는 버드나무 중심으로 한 바퀴를 둘러 저 자신을 세웠다. 빈틈없이 빼곡하게도 자신의 나무인 대나무를 심었다. '아가. 엄마는 아가를 지킬 거란다. 제일 안전한 길을 갈 수 있게끔, 최고의 나무가 될 수 있게끔 너를 지킬 거란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다 너를 위한 거란다.' 버드나무는 날 때부터 대나무 안에 갇혀 자라났다. 아주 어릴 땐 그러니까 버드나무가 잎을 무성히 피우기 전, 아직 뿌리조차 땅 속에 굳건히 내리지 못했을 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가 답답하지 않았더랬다. 일 년 십 년이 지나 점차 버드나무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하면서 버드나무는 대나무가 숨이 막혔다. 더 자라나고 싶었건만 대나무에 막혀 가지를 무성하게 펼칠 수가 없었다. 버드나무가 자라기엔 대나무가 내어준 공간이 너무나도 작고 좁게만 느껴졌다.
"엄마. 오늘 제 가지에 새들이 놀러 왔어요."
"아가. 새는 나무에게 좋지 않단다. 그저 둥지만 틀 뿐이지. 내일 나뭇가지를 흔들어 새들을 모조리 쫓아내렴. "
"엄마. 오늘 비가 와서 몸이 너무 아파요. 잠시 잎사귀들을 움츠려도 괜찮을까요."
"아가. 고통을 견뎌야 더 굳건한 나무가 된단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나중엔 엄마 말 듣길 잘했다 생각할 거야."
"엄마. 저도 다른 마을에 씨를 뿌리고 싶어요. 제 친구는 이미 다른 마을에 다녀와봤대요."
"아가. 그것은 시간 낭비란다. 엄마가 이미 너를 위한 최고의 마을을 만들어놨잖니. 너는 그저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우면 되는 거란다."
대나무는 버드나무를 사랑했다.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 아주 끔찍하게 사랑했다. 버드나무 또한 대나무를 사랑했다. 숨이 막힐 때도 있었지만 버드나무가 대나무를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두 그루의 나무는 저 자신들의 방식대로 서로를 사랑했다. 비록 버드나무는 자신의 마을에 더 이상 새들이 찾아들지 않고, 비가 오는 날엔 잎사귀를 움츠리지 못했으며, 단 한 번도 다른 마을을 겪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나무 안에서 계속해서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대나무와 버드나무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고성이 오고 가는 아주 큰 싸움이었다. 대나무가 버드나무에게 말했다.
"아가, 내가 너를 잘못 키운 것 같구나."
"엄마, 엄마한테서 벗어나고 싶어요." 버드나무도 말했다.
버드나무의 말은 이루어졌다. 어느 날 큰 톱을 든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버드나무를 둘러싼 대나무를 사정없이 베어냈다. '엄마, 엄마! 가지 말아요. 엄마!' 버드나무는 안간힘을 쓰며 속절없이 베어나가는 대나무를 지키려 잎사귀를 한껏 펼쳐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가, 아가. 엄마를 보렴." 꺾여나가는 대나무가 떨리는 손으로 버드나무의 눈물을 훔쳐주며 말했다.
"아가. 엄마가 알려준 것들을 절대 잊지 말고 마음에 잘 새기며 살아가렴. 그럼 꼭 최고의 나무가 될 수 있을 거야.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어이 형씨! 여기 버드나무는 그냥 놔둬. 우리는 이 대나무만 베어내면 된다고."
"알고 있다네, 그나저나 허 참. 희한한 광경이네 그려. 버드나무에 무슨 대나무가 이리 뿌리를 내리고 있나."
"그러게나 말이여. 이거 꼭 대나무가 버드나무를 지키고 있는 거 같지 않아?"
"어이구. 이 양반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먼. 지키기는 무얼 지킨다는 말인가. 버드나무가 더는 못 자라게 막고 있는 게지."
"그런가? 그래도 대나무 덕에 지지대 하나 없이 이리 꼿꼿하게 잘 자라지 않았나."
"이 답답한 양반아. 나무가 왜 나무겠는가, 응? 저기 저 높은 하늘을 향해 마음껏 제 가지를 펼치며 자라야, 그게 나무인 게지!"
버드나무는 남겨졌다. 저를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일 년 십 년이 흘렀다. 버드나무는 대나무의 가르침대로 날아드는 새를 쫓아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잎사귀를 단 한 번도 움츠러들지 않았으며 다른 마을에 대한 존재는 이미 까마득하게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어딘가 부족함을 느꼈다. 무엇이 부족한가. 골똘히 고민하던 버드나무가 무언가 깨달은 듯이 자신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큰 나뭇가지들을 주워 돌아왔다. 그러곤 자신의 주위로 그 나뭇가지들을 빙 둘러 세웠다. 나뭇가지에 둘러싸인 버드나무는 자신이 찾던 것이 바로 이것임을, 그 속에서 비로소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대나무에게서 벗어난 버드나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두었다.
산수유나무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대나무와 버드나무는 그들끼리 서로 열을 올리느라 미처 산수유나무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였다. 대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산수유나무까지. 이 셋은 늘 같은 마을에 있었지만 왜 인지 산수유나무는 자신이 그 마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마을의 중심은 대나무와 버드나무였지 산수유나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산수유나무는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떠날 수도 있었지만 이 마을엔 자신이 사랑하는 버드나무가 있었다. 버드나무는 대나무와 열을 올리는 와중에도 한 손으론 산수유나무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산수유나무도 자신을 잡고 있는 버드나무의 손을 필사적으로 잡으려 했다. 이따금 손을 놓치는 날엔 허겁지겁 다시 그의 손을 잡아 붙들었다. 한편 당시의 버드나무는 이렇게 생각했다. 대나무와 산수유나무 사이에 놓인 자신이 잘 견뎌내야 한다고. 자신이 무너지면 대나무는 그다음으로 산수유나무를 지키려 들 것이다. 버드나무는 산수유나무에게 자신이 겪는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이 중간에서 잘 버틴다면 산수유나무만큼은 자유로이 자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세 나무의 이야기는 참으로 지긋했다. 허나 아무리 지긋한 이야기도 세월 앞에서는 무색해지는 법.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일들을 지나쳤다. 버드나무는 대나무한테서 벗어났고 동시에 스스로의 대나무를 세웠다. 산수유나무는 끝없는 외로움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꿋꿋이 자라났다. 마을에는 버드나무와 산수유나무만 남았기에 그들은 다른 의지할 곳 없이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부턴가 버드나무는 자기를 둘러싼 나뭇가지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산수유나무는 그런 버드나무가 걱정됐으나 그 누구보다 동경하던 버드나무였기에 말을 아꼈다. 그러던 와중 산수유나무가 갑자기 시름시름 앓게 된 것이다. 버드나무는 나뭇가지에게 말했다.
"엄마, 엄마. 산수유나무가 아파요. 제 동생 산수유나무가 많이 아파요."
나뭇가지가 말한다. 산수유나무를 지키라 말한다. 버드나무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제껏 자신은 산수유나무를 지켜왔던 게 아니었나. 비가 오면 막아주고 뿌리를 굳건히 내리기 힘들어하는 날엔 제 자신의 뿌리를 떼어내 심어주고 열매의 윤기가 조금이라도 덜 반짝일 때에는 잎사귀로 하염없이 열매를 닦아내어주지 않았던가. 버드나무는 그 누구보다 산수유나무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렇게 온 힘을 다 해 지켜내고 있었건만 산수유나무는 대체 왜 낫지를 않는 걸까. 해답을 찾은 건 점점 시들어가는 산수유나무를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다음 날이었다.
인간들이 찾아왔다. 엄마 대나무를 베어냈던 그 인간들이었다. 버드나무는 비상이 걸렸다.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버드나무는 필사적으로 산수유나무를 감싸 안았다. 인간들이 허이고, 저번에는 대나무가 버드나무를 꽁꽁 감싸더니 이제는 버드나무가 산수유나무를 감싸는구먼. 희한한 숲이야 정말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나 아량곳 않고 더더욱 힘을 주어 산수유나무를 품에 안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버드나무는 역부족이었다. 인간들은 버드나무를 마구 헤집어 기어코 산수유나무를 드러냈다. '아, 이제 정말 끝이다. 나는 결국 산수유나무마저 잃고 마는구나.' 버드나무는 망연자실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인간이 하는 소리에 버드나무는 두 눈을 번쩍 뜨었다. 몇십 년 전 나무는 하늘을 향해 마음껏 가지를 펼쳐야 한다고 말했던 인간이었다. 이제는 나이가 지긋이 들어 흰머리가 희끗희끗 난 인간이 말했다. "이런 영양제 꼽아봐야 소용이 없어! 나무는 해를 봐야 하는데 이것 보게나. 여기는 햇살 한 줌도 없지 않은가. 나무가 시들어가는 것도 당연하지. 곧 있으면 저 큰 버드나무도 끝을 보고 말테야."
버드나무는 해답을 찾은 것 같았다. 햇살. 그렇다. 산수유나무를 살릴 수 있는 건 바로 햇살이었다. 버드나무가 눈물로 뒤덮인 얼굴을 들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인간에게 말했다.
"아저씨, 햇살이 뭔가요." 인간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헛기침을 흠! 하며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해를 본 적 없는 네게, 햇살에 대해 말 해준들 어떻게 알 수 있겠나."
"그래도 말씀해 주세요. 이건 제 동생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인간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간절한 버드나무의 호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눈이 부시게 빛을 내는 햇살은 온기라네. 산수유나무에게는 온기가 필요 해. 온기는 다른 말로 사랑이지. 산수유나무에겐 햇살이 필요 해. 네 동생에게는 사랑이 필요 해."
인간들이 돌아갔다. 버드나무와 산수유나무를 딱히 여겨 산수유나무 주위로 정성스레 영양제를 꼽아주고는 제 마을로 돌아갔다. 인간들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산수유나무는 여전히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버드나무는 햇살을 모른다. 온기라는 것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산수유나무에게 햇살을 내어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순간 인간이 떠나기 전 남기고 간 말이 생각난다. '너희는 날 때부터 해라는 존재를 모르고 태어났으니 산수유나무를 살릴 수 없을 것이다.' 버드나무는 저 자신을 둘러싼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엄마는 왜 내게 해를 가르쳐주지 않으셨나요. 새를 쫓아내고, 빗물에 견뎌내고, 정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 모든 방법들은 알려주셨으면서 왜 단 한 번도 해에 대해서는 말해 준 적이 없으세요? 무언가를 지키는 건 굳은 얼굴로 그 주변의 모든 것들을 쳐내는 게 아니래요. 햇살, 한 줌의 햇살. 그것이 진정으로 지키는 방법이래요. 엄마는 모르셨죠? 우리 같이 산수유나무를 지키자고 그렇게 말했으면서 정작 엄마도 지키는 방법을 모르셨던 거죠?"
버드나무 하나가 잎을 축 늘어뜨리곤 흙바닥에 물방울을 하나씩 떨어뜨린다. 나는 왜 인지 이 나무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산수유나무를 바라보며 한 방울씩 눈물을 떨어뜨린다. 떨어뜨리는 눈물방울 방울이 흙 위로 쌓이고 또 쌓인다. 버드나무는 산수유나무 앞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마침내 눈물이 모여 냇가를 만들어냈다.
버드나무와 산수유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는 냇가가 만들어졌다.
이 냇가는 버드나무의 눈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