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야 Oct 14. 2023

세상의 모든 이제야들에게

그래서 이제야 씨. 당신은 지금 어느 계절에 머물러 있나요? 




띠리리. 띠리리. 


"어으.. 몇 시야.."


오늘도 어김없이 울려대는 알람 소리에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엣취. 간밤에 틀고 잔 에어컨 때문인가. 감기 기운이 살짝 도는 것 같다. 이제 여름은 다 갔구나. 밤공기가 부쩍 차가워졌다. 


냐옹.


"오뚜 씨. 잘 주무셨는가아."


집사의 인기척에 내 첫째 고양이 오뜨가 방으로 들어왔다. 반쯤 감은 눈으로 아침 인사를 나눴다. 이대로 함께 도로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더 지체했다간 지각을 할지도 모른다. 


"오뜨야. 언니가 더 만져주곤 싶은데. 네 사료값 벌러 가야 한다."


저벅저벅. 사람 발걸음 소리 뒤로 토닥토닥. 작은 발걸음 소리가 따라붙는다. 아잇. 따라오지 말고 저리 가서 아침밥이나 먹고 있어. 오뜨를 번쩍 들어 안아 올려 밥그릇 앞에 내려놓았다. 오독오독. 사료 씹는 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욕실로 향할 수 있는 우리 집 아침의 일상 풍경이다. 


쏴아아.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었다. 자자. 이제 정신 좀 차리자. 저번처럼 또 지각을 할 순 없잖아? 지체 없이 흐르는 물줄기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뻗었다. 손바닥에 가득 담은 물웅덩이를 그대로 얼굴에 철퍽철퍽 잘도 적셔댄다. 아 차가워. 얼굴에 가득 얹어진 폼클렌징 거품에 실눈으로 세면대를 더듬어 수도꼭지를 온수 쪽으로 겨우 돌렸다. 


"휴. 이제 좀 잠이 깰 것 같네."


어느새 말끔히 씻겨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대로 욕실 찬장에서 수건을 꺼내 남아있는 물기를 마저 닦으려다 문득 거울에 튀어있는 하얀 거품이 눈에 띄었다. 참 요란하게도 세수한다. 뽀득뽀득 흔적을 닦아내곤 어서 마저 출근 준비해야지. 스스로를 재촉하려던 순간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마냥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별안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안녕하세요."


"제야 씨. 좀 늦었네?"


젠장. 아침부터 뜬금없이 거울 삼매경을 헤맨 탓에 결국 몇 분 지각을 해버렸다. 아오. 갑자기 거울은 왜 들여다봐서는. 전생에 뭐 백설공주이기라도 한 거냐고. 팀장님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우리 회사 팀장님은 한눈에 보아도 미인이지만 그보다는 특유의 차가운 인상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이었다. 엣취.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아침에 느껴진 미약했던 감기 기운이 확 올라오는 듯하다. 꾸벅. 늦어 죄송하다 말씀드리니 어서 자리에 앉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내 두 번 다시 아침에 늦장부리나 봐라. 주섬 주섬 책상 위로 짐을 풀며 오늘도 나는 몇 달도 체 지키지 않을 각오를 다진다.


"좋은 아침입니다. 와, 팀장님! 오늘 아침 날씨 보셨어요?"


"오늘 단체로 지각하기로 결정한 날인가요?"


저저. 눈치는 진즉에 엿 바꿔 먹은 사람 같으니. 늦었으면 알아서 굽신굽신 기어들어올 것이지 뭘 잘했다고 날씨 타령이야 타령은. 동료 희연이었다. 팀장님 뒤에 앉아있던 내가 필사적으로 사인을 보냈건만 그녀는 이 마저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에이. 팀장님~ 고작 삼 분 늦은 건데 이 화창한 날씨를 봐서라도 좀 봐주세요. 가을바람이 너무 시원한 탓에 바로 건물로 들어오지 못한 거라고요."


희연은 해맑은 사람이다. 눈치는 다소 부족할지라도 성격 하나는 끝내주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땐 저렇게 한없이 밝고 긍정적인 사람도 있구나. 마치 딴 세상 사람을 만난 마냥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녀의 환한 웃음 탓이었을까. 평소 칼바람이 쌩쌩 부는 팀장이 속절없이 무방해제되었다. 너만큼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허를 내두르며 그만 떠들고 어서 자리에 앉으라 말했다. 


"이제 여름은 다 갔네."


NPC처럼 늘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과장님이 웬일로 한 마디 거들었다. 저 인간이 이런 대화에 다 끼는 경우도 있네. 이것이 날씨 토크의 위력인가. '어색한 분위기에서는 날씨로 대화의 물꼬를 틀 것'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이 떠올랐다. 제목이 <당신도 영업맨이 될 수 있습니다>였던가. 


"과장님은 여름이 좋으세요?" 희연이 이때다 싶은 눈빛으로 과장의 말을 덥석 물었다.


"응. 좋아." 무미건조한 목소리의 과장이 답했다. 


"오. 신기하네요. 보통 나이가 들면 여름이 힘겨워진다던데."


아, 김희연. 성격 좋다는 말을 취소해야 하나. 쟤 그냥 생각이 없는 거 아냐?


"힘들지. 그래도 청춘 드라마하면 여름이잖아. 패기, 열정이 묻어나는 계절이기도 하고. 그래서 여름이 좋아." 


과장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정의 말에 모두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일단은 저 인간이 두 마디 이상의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 놀랐고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와는 달리 읊어대는 말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에 두 번 놀랐다. 역시 사람은 알다가도 모를 존재이다. 


"으. 그래도 전 여름이 싫어요. 너무 더워요."


"제야 씨는?"


"네? 저요?"


대화에서 빠져있는 줄로만 알았던 팀장님이 나를 지목했다. 오늘 다들 왜 이래? 왜들 이리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제야도 여름 싫어해요! 쟤 여름 되면 휴무엔 집에 박혀서 나오지도 않아요. 그렇지 제아야?"


희연의 말이 맞다. 나는 여름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그러니까 여름은 내게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연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머뭇거림 없이 '응. 싫어해'라고 답했을 것이다.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옅은 미소를 띠었다.


"어라?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그냥. 너무 미워하지만은 않기로 했어."




인생은 책장 넘기듯이 다음장으로 넘어가는 그런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챕터 사이사이를 넘나드는 그리고 그 챕터들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그러한 유기적인 무언가였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내 인생은 몇 페이지에 접어들었을까. 늘 여름날에 머무른다 생각했지만 이 또한 진실은 아니었다.


때때로 불어오는 갈바람에 한숨을 돌리기도 했고 겨울날의 차디찬 고비를 겪기도 하였다. 또 가끔은 내 인생에 봄이 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흘러넘치는 생명력을 어렴풋이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내 마음에 달려있는 문제였다. 수도 없이 다가오고 지나치는 사계절을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냐 하는 그런 류의 문제였다. 


지금도 엄마를 마주하고 있자면 지난날 힘겨웠던 폭염이 눈앞에 드리우는 듯할 때가 있다. 다시 여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 폭염이 더는 나를 가두지 못하리라. 설령 돌고 돌아 또다시 이 때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 인생의 결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마지막 챕터를 향해 가는 수많은 전개 중 하나일 것이다. 


내 인생은 어릴 적 읽었던 동화처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기에 바로 삶의 의의가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우리만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간절하지만 너무 절박하지는 않게. 한 발자국씩 떼다 보면 어느새 걸어온 모든 발자취들이 나의 자산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현재 여름에 머물고 있는 세상 모든 이제야들에게 이 글을 전하여 작은 위로를 건넨다. 

이전 11화 동생을 버린 언니(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