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라는 표현이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따라다니는 낙인과도 같은 것이다. 누구나 주홍글씨 하나쯤은 달고 살아가는 걸까? 설령 그런다 한들 겉으로 봐선 알 수 없다. 주홍글씨는 말 그대로 낙인이기에 그 누구도 쉬이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어디까지 밝혀야 하는 걸까?" 고민이 많았다.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문장을 썼다 지웠다, 수도 없이 반복했다.
마저 용기를 내어본다. 이 글의 끝이 정확히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지만 기왕 시작했으니 어떻게든 끝까지 가보리라. 내 두 손으로 가정사를 도마 위에 올린 일이 결국 내 두 눈을 찌르는 일만으로 끝나지 않기를. 그럴 수밖에 없다면 부디 손에 쥘 수 있는 다른 무언가도 함께하기를 바란다. 한낱 과거 회상에 불과한 글로 허망하게 끝맺음을 맺고 싶지 않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재미난 싸움 구경에 옹기종기 몰려들었다. 저 뭔 일이래? 몰라, 딸내미 하나 두고 데려가네 마네 싸우는 거 같은데? 웅성웅성 그 난리통에도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뚜렷하게 들려왔다.
"제아야! 차에 타라. 엄마랑 가자!"
박 가네 다크호스. 외할머니가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할머니가 나를 데려가겠다고 엄마 차 안으로 거의 욱여넣다시피 힘을 가하고 있었다.
아빠 눈이 돌아갔다.
퍽!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동네 사람들 여기 좀 보소. 사위가 장모 팬다!"
얼마나 즐거운 구경거리였을까? 원래 막장 드라마가 제일 재밌는 법이랬다. 아빠 멱살을 잡고 흔드는 엄마, 손녀를 차에 욱여넣는 할머니, 장모의 등짝을 가격한 사위. 이런 환상의 조합, 아니 환장의 조합. 또 없으리라.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동시에 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울면서 웃고 있는 미쳐버린 딸자식까지 조합에 추가된 순간이었다.
아빠와 나는 어쩔 수 없는 패륜의 피가 흐르나 보다. 가출한 딸과 폭력을 가한 아빠라니. 내가 가출하지 않았다면 아빠 또한 '장모 팬 사위'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애초에 이 모든 게 과연 내 탓은 맞는 걸까.
사람들은 괄호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정신적 학대로 인해) 가출한 딸, (자식을 구하기 위해) 폭력을 가한 아빠. 막장 드라마가 원래 그렇다. 등장인물이 어떤 막장짓을 했냐가 중요하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는 세세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사연보다는 현상이 대중의 이목을 더 사로잡기 쉽다는 사실을, 그날 우리 가족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깨달았다.
다시 시간은 흘러 여름을 지나 어느새 겨울에 다다랐다. 겨울에 집을 나왔으니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셈이었다.
"엄마가 뭐라 해도 크게 신경 쓰지 말고. 맛있는 저녁 먹고 온다 생각해."
아빠가 말했다.
"응. 갔다 올게."
그날 아빠는 뒤돌아 서는 딸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그 사달을 겪고도 나는 이따금씩 엄마 집에 들르곤 했다. 천륜은 내 생각보다 훨씬 질긴 인연이었다. 무엇보다 엄마 집에 두고 온 동생이 계속해서 눈에 밟힌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엄마 심사가 뒤틀리는 날엔 나한테 했던 것처럼 동생에게도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심사가 완전히 뒤틀리기 전에 한 번씩 방문하여 누그러뜨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또 한 두 달 정도는 고요히 지나갈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일종의 가스 검침원이었다. 똑똑. 혹시 귀하의 댁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은 아니신가요? 안전을 위하여 예방차 방문했습니다.
"왔나."
"언니!"
여전한 내복 차림의 동생이 뛰어나왔다. 아차. 그 모습에 반사적으로 오른손에 들려있는 까만 봉지를 거꾸로 뒤집을 뻔했다. 이제는 상황이 다르지. 씁쓸한 웃음을 감추며 동생에게 과자가 담긴 봉지를 건네주었다.
"밥 먹어라."
집은 여전했다. 여전히 서늘했으며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다.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내복을 겹겹이 입은 동생의 모습이 이를 증명해 주었다. 엄마와 동생은 이미 식사를 마친 후였다. 당시 엄마 집 거실에는 식탁이 놓여있었는데 그 식탁 대각선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면 안방문이 보였다. 나는 식탁에 앉아있었고 엄마와 동생은 안방 문을 열어둔 체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통수로 느껴지는 두 사람의 시선이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개의치 않고 이내 숟가락을 집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집어 들려던 찰나였다.
"남자에 미쳐 동생 버리고 나가더니 밥은 넘어가는가 보네."
시X.
지금껏 몇 편의 글을 쓰면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욕 나오는 순간인 것이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대신에 식탁 위 놓인 그릇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들어 벽으로 무참하게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양손으로 식탁 모서리 끝을 잡아 그대로 상을 엎어버리고 싶은 그런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당장 신발장으로 뛰어가 엄마가 즐겨 사용하던 망치를 꺼내 방문을 사정없이 찍어 누르기라도 하면 이 마음이 가라앉을까. 이 분노가 사라질까. 마치 땅바닥이 불에 달궈지기라도 한 마냥 집안 곳곳을 방방 뛰어다니며 온 집을 헤집어 버려야,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리 했냐고 묻는다면 아니. 그러지 않았다. 위와 같은 충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저 깊은 곳에서는 그게 아니라고, 사실은 바닥에 형편없는 꼴로 드러누워 그저 울어 젖히고 싶은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지금 화를 내고 싶은 게 아니라 데굴데굴 구르면서 집이 떠나라 울고 싶은 거라고. 그것이 너의 진짜 속마음임을 또 다른 나 자신이 알려주었다.
그러니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안을 때려 부수지도 바닥에 뒹굴어 울지도 않았다. 애당초 그날 나의 본분은 가스 검침원이었지 미치광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성질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그 여파는 내가 아닌 동생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나마저 엄마처럼 본인만 생각하며 이성의 끈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잘것없는 나는 고작해야 뒤를 돌아 엄마를 한번 바라볼 뿐이었다. 그 마저도 세상천지 부모를 니 같은 눈으로 노려보는 자식은 없을 거라는 악에 받친 말이 날아왔지만 그렇게라도 일단락이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실 식탁과 안방이 대각선 구조라 참 다행이다. 엄마와 동생이 내 뒷모습만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꾹꾹 밥알이 야무지게도 담긴 밥그릇 위로 소리 없는 눈물이 뚝뚝 흘렀다.
이것이 내가 가출을 한 사연이다. 우리 엄마 기준으로 동생을 버린 사연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그러다 내 나이 삼십 대를 코 앞에 두고서야 꺼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십 대 이제야의 이야기를 이제야 꺼낸다. 오래도 묻었다. 오래도 참았다.
대게 시련, 고통, 아픔이라 하면 밤 또는 겨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서로 공통된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시련은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한여름 정오의 햇빛이 내리쬐는 뙤약볕에서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얼마나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을지. 그러한 종류의 고통이었다. 물속으로 가라앉고 침체되는 아픔이 아니라 열기가 들끓고 솟구치는 아픔이었다. 나는 어릴 적 대항할 수 없는 열기에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린 경험이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또 다른 의미로 나름의 보호 장치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양산을 들었다. 그늘을 만들어냈다. 여름이라는 계절에 나름대로 대항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독립을 했고 밥벌이를 했으며 수십 번의 달궈짐 끝에 유약했던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진 덕분이었다. 처음 양산을 들어 햇빛을 가렸을 때는 숨통이 화악 트이는 듯했다. 와, 이제 됐어. 난 이제 살 수 있어. 더는 녹지 않아도 돼.
그렇게 일 년 이 년 세월을 흘러 보냈다. 멍청하게도 이만 하면 됐다고 생각하며 시간을 죽였다. 된 게 아니었다. 계절은 흘러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가 들어가는 내 겉모습과는 다르게 내 인생의 계절은 여름에 멈춰 있었다. 그 여름은 쉬이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이 꼼짝도 않고 내 등 뒤에 꿋꿋이 서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처음 환희를 느끼게 해 주었던 양산이 어떻게 된 일인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팔이 저렸다. 대항을 하는 일에도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아. 계절에 대항하는 어리석음이라니.
계절은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 보내야 하는 것이다. 여름이라는 시련에 양산을 쓸 것이 아니라 계절을 흘러 보내는 법을, 과거의 기억에 더는 얽매이지 않고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그래야만 내 인생도 가을이라는 다음 계절로 접어들 수 있으리라. 열기에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리던 십 대에서 온몸으로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이십 대를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과거도 오래 붙들고 있으면 집착이 피어오른다.
놓자.
여름을 그만 놓아주자. 가을이 올 것이다. 갈바람이 뜨겁게 달궈진 내 마음을 식혀줄 것이다. 그러면 또 겨울이 오겠지. 가을에 한숨을 돌리고 더욱 단단해진 몸과 마음으로 겨울을 맞이하자. 겨울이라는 시련은 겪어보지 않아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게는 여름이라는 경험이 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나와 함께 끌어안아 온기를 나눌 사람들도 생겼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봄이 올 것이다. 생명이 넘치고 아이들이 동산에서 뛰어노는 그런 봄이 올 것이다. 봄까지 가고 마리라. 나 죽기 전 반드시 인생의 꽃을 한 번은 피우고 마리라. 그러기 위해선 먼저 여름을 놓아주어야 했다. 과거를 흘러 보내야 했다.
이것만이 진정한 구원이 길임을 오랜 방황 끝에 이제야 겨우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