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너그러이 봐주면 안 되나요?
위선자. 이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사람"이다. 모순이라는 단어와도 연관이 있겠다. 모순의 사전적 정의는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일치하지 아니함"이다. 즉, 이 두 단어의 조합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된다.
겉으로만 반듯해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아니한 사람.
스물두 살 즈음의 어느 날 나는 위와 같은 평가를 받았다. "내 딸이지만 대단하다"에서 "너 이제 보니 말로만 그런 거였구나"로 나에 대한 평가가 고꾸라진 경험이 있다.
내 왼쪽 손목에는 네 줄의 뚜렷한 흉터가 있다. 양 팔뚝에는 헤아려 보지 않았지만 또한 몇 줄의 흉터가 있으며 왼쪽 가슴도 마찬가지다.
처음 자해를 시작한 건 중학교 삼 학년 때의 일이었다. 나는 그날 엄마의 심기를 거슬렸다. 하늘에 새까만 밤이불이 덮인 새벽이었다. 나도 이불을 덮고 자려던 순간,
휙.
갑자기 이불이 걷어지더니 스위치가 달칵하고 켜졌다. 우리 집에 별안간 아침이 찾아왔다. "나는 이렇게 화가 나는데 너는 잠이 오냐?"라는 엄마의 말 때문이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더 화가 나 보였다. 거실로 가서 앉아있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쳇. 졸려 죽겠는데.
거실 바닥에서 잠들 생각으로 베개와 이불을 챙겨 나가려 했건만 그마저도 빼앗겼다. 누워있지 말고 앉아있으란다. 우리 집은 당시에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어서 거실에는 열 명정도는 거뜬히 앉아있을 수 있는 대형 탁자가 있었다. 나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그 탁자에 앉아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아야 했다. 그전까지는 안방으로 들어올 생각도 마라는 엄포가 내렸기 때문이다.
꾸벅꾸벅.
학창 시절의 나는 어느 곳이든 머리만 대면 잠에 들었다. 살인적인 스케줄 덕분이었다. 학원이 끝나면 기본적으로 열 시 즈음이었고 열 두시를 넘겨 다음날이나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날도 허다했다. 마침내 이마가 탁자 상판 위로 맞닿을 때쯤 쾅하고 안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졸지 말고 생각해!"
화들짝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했지만 재빨리 자세를 원상복구 시키며 한 순간도 졸지 않은 척을 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세 시였다. 너무 놀란 탓일까. 잠이 다 달아났다. 이제 더는 졸리지 않았다.
째깍째깍.
애당초 내 잘못이 무언인가 생각할 마음은 없었다.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다. 잘못이라면 엄마의 심기를 거슬렸다 단지 이뿐이었다. 진실로 내 잘못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고, 어머니. 소자가 감히 어머니의 심기를 거슬러 죽을죄를 졌습니다요."라고 말하면 이번에는 문밖으로 쫓겨날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째깍째깍.
암흑이 내린 거실은 고요했다. 적막 속에 규칙적인 시침 소리만 들려온다. 한 순간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잘못한 점을 어떻게든 쥐어 짜내고 얼른 자야겠다 마음먹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째깍째깍.
시침 소리에 맞춰 쿵쿵 울려대는 심장 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째깍째깍. 쿵쿵. 째깍째깍. 쿵쿵. 얼마쯤 지났을까. 시계와 심장이 만들어낸 하모니에 다른 화음이 곁들여졌다. 벅벅.
째깍째깍. 쿵쿵. 벅벅.
왠지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게 맞을까? 지금 떠올리면 중이병다운 생각이었지만 당시에는 나름 진지했다. 매일 아침 학교를 가고 밤늦게 집에 들어오고 가끔씩은 이렇게 밤을 꼴딱 새우고.
왜 사는 거지?
그래. 피가 난다면 살아있는 거겠지. 오른손으로 왼 손목을 긁었다. 손톱으로 날을 세워 사정없이 긁었다. 아프지 않았다. 바짝 세운 손톱 날과 달리 감각이 무뎠다. 그렇게 기괴한 하모니가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엄마가 방에 들어와서 자도 된다는 아량을 베풀었다.
다음날 핏자국이 선명한 손목 흉터를 본 내 친구가 아연질색을 하며 보건실로 나를 끌고 갔다. 보건 선생님도 기겁을 하며 왜 이리됐냐고 물었다. 무감각한 내 표정을 읽으시곤 말없이 처치를 해주셨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로 자해는 시도 때도 없이 이뤄졌다. 더 이상 손톱은 사용하지 않았다. 피를 보려면 한참을 긁어야 하는데 이 점이 번거롭다고 느꼈던 것 같다. 커터칼 날이 계속해서 무뎌져가는 만큼 내 몸의 흉터는 늘어났다. 이유는 다양했다.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에 혹은 이유가 없다는 게 이유가 되기도 했다. 자해는 스무 살부터 스물여섯까지였나.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십 대에는 가벼웠고 성인이 된 후론 본격적이었다. 하루는 피가 흐르는 어깨에 메디폼을 아무렇게나 붙이고 나타나(대놓고 보이진 않았지만 옷 위로 피가 조금씩 새어 나와 알게 되었다) 타인의 손에 이끌려 정형외과에서 몇십 바늘을 꿰맨 적도 있었다.
아.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아빠가 알게 되었다.
"어디 내 앞에서도 해봐라!"
아빠는 자신 앞으로 소환된 내게 소리쳤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침묵을 지켰다. 묵묵부답에 아빠는 부엌으로 가서 칼을 들고 와 내 옆으로 툭 던졌다. 어디 아빠 보는 앞에서도 해보란 뜻이었다. 나는 이 상황이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그보단 아빠가 상심이 크구나 하는 생각이 더 컸다.
"아빠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은 자식을 낳은 일이다."
어느 날 아빠가 말했다.
"한 순간 살아갈 동기를 잃은 듯했다."
자해 소동이 벌여진 다음날 아빠가 말했다.
아빠의 가장 큰 자부심에서 가장 큰 상심으로 추락해 버렸다. 젠장. 이런 의도는 없었는데. 본의 아니게 대못을 박은 것 같아 죄스런 마음이 들다가도 어젯밤 아빠의 말 한마디가 뇌리에 박혀 신경이 쓰였다.
"너 굉장히 번듯한 척하더니 지금 보니 다 위선이었구나."
아빠를 이해한다. 우리 집안은 나 포함해서 모두 소위 말하는 욱하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나는 다소 과격한 아빠의 반응과 별개로 아빠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내 몸에 선명한 줄이 그인 만큼 아빠의 마음에도 줄이 그였던 것이다. 상처를 받으면 어떤 이는 울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당시 상황이 험악하기도 했지만 아빠의 마음에 흉을 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 공포스러웠다.
십 대 끝자락에 아빠 쪽으로 넘어와 일 년 즈음을 같이 살았다. 그 후 아빠가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나를 데려갈 상황이 아니라 잠시 할머니 집에 맡겼다. 할머니 집에는 할머니와 고모 가족이 함께 살았다. 고모, 고모부, 사촌 언니 그리고 할머니까지 이렇게 네 명이 한 지붕 밑에서 지냈다.
사촌 언니는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럴만했다. 이놈의 삼촌들이 툭하면 자식을 할머니 집에 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치다꺼리는 자연히 늙은 할머니가 아닌 고모가 도맡아야 했었다. 본인의 엄마가 고생을 하니 사촌 언니 입장에서는 당연히 내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나는 분위기 감지를 잘한다. 무던해 보이는 성격 밑에 예민한 성정이 깔려 있는데 어떨 때는 되게 눈치가 없다가도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 하나는 마약견이 마약을 탐지하듯 기가 막히게 알아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한 그날 나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여기선 골칫거리가 되어선 안 되겠군.
다행히 적응은 내 주특기였다. 언니도 서서히 내게 마음을 열었고 어느 순간 나로 인해 집안에 활력이 돌았다. 어쩜 그리 성격이 좋냐라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었다. 실로 내 성격이 좋았냐 하면 좋아야만 했는 쪽에 가까웠다. 아니, 그렇지 않은가. 가정사 문제는 내 가정 내에서나 드러낼 수 있는 거지 맡겨진 나는 성격이라도 좋아야 했다.
물론 그 누구도 내게 눈치를 주진 않았다. 모두 나를 따뜻이 맞이해 주었다. 언니도 처음에만 그랬을 뿐 그만하면 잘 품어줬다. 할머니 집에서 지내는 몇 년 동안 정을 많이 느꼈다. 그렇지만 원가족이라는 개념에서 느껴지는 정은 아니었기에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드러낼 수는 없었다.
아빠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할머니 집에 들렀다. 우리는 내 방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는 내게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너는 참 나이에 비해 현명하다. 아빠는 그 나이 때 그런 생각을 못 했거든."
이해가 안 됐다. 그냥 생각한 대로 말한 것일 뿐 스스로가 현명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와서 곰곰이 돌이켜 보면 진짜 내 진심 한 오십 프로, 떨어져 있는 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해서가 한 삼십 프로, 나머지 이십 프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또 그러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과거에 얽매여 사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라는 식의 말을 했다고 했을 때. 진짜 그렇게 생각한 마음 오십 프로, 그러니 엄마와의 과거를 걱정하지 말라는 뜻 삼십 프로, 나 스스로 그렇게 살자고 다짐한 마음 이십 프로였던 것이다.
문제는 저런 말 뒤에 몇 마디가 더 따라붙는 경우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인데,
"과거에 얽매여 사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 그런데 가끔 생각날 때가 있어서 괴로워."
나는 여기서 뒷 문장을 생략했다. 뒷 문장이 매번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따금씩이었다. 그런데 이 이따금도 차곡차곡 쌓이게 되면 강력한 한방이 되어버린다. 이 사실을 간과하고 계속해서 뒷 문장을 생략하며 몇 년을 살았다. 그러니 아빠는 나를 '비록 힘든 상황을 겪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바르게 살아가는 자식'으로 인식할 만도 했던 것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행동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렸을 적의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잘하면 된다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아, 어리석기도 하지. 몸의 상처는 늘어나는데 대체 무엇을 컨트롤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일까?
"너 굉장히 번듯한 척하더니 지금 보니 다 위선이었구나."
아빠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수치심이었다. 나는 위선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수치심이 없는 위선'과 또 하나는 '수치심을 아는 위선'이다. 이 둘은 질적으로 다르다.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모르는 게 약이다는 말이 있다. 나는 저 순간 이 말이 딱 맞다고 생각했다. 모르면 부끄럽지도 않을 텐데. 이 수치심이라는 감각을 모른다면 이렇게 쥐구멍에 숨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을 텐데. 그러기엔 내 위선은 수치심을 아는 위선이었다.
수치심을 느끼는 자, 얼굴을 붉히게 되리라.
아빠가 뭘 알아. 아빠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건 미안하지만, 어? 나도 번듯한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기도 했단 말이야. 그냥 화만 내도 충분히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느꼈을 텐데 위선자라니. 너무하잖아!
이런 마음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다. 울컥, 삐뚤어진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빠가 알 수가 있었나? 내가 말한 적이 없는데?
지금은 안다. 다 안다. 아빠의 마음도 내 마음도 모두 알고 있다. 아빠와 나는 서툴렀다. 십여 년 동안 떨어져 있던 부녀의 공백을 일 이년만의 대화로 채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비극은 비극일 뿐 그 속의 잘잘못을 따지면 둘 모두의 상처가 헤집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일을 마음에 묻고 시간이라는 약을 빌렸다. 그 일을 묻지 않고 낱낱이 파헤치기엔 아빠와 나는 각자의 마음을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우리는 나름대로 잘 추스를 수 있었다. 물론 큰 상처는 아물었을지언정 미세한 실금은 남아있었지만 그때는 응급조치가 더욱 시급했기에 실금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마침내 그 실금을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미처 치유하지 못한, 옅은 흔적으로 남아버린 실금을 마저 지울 때가 되었다.
우리는 한순간의 단편만을 보고 그 사람의 전체를 판단하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날 내가 아빠에게 그랬었고 아빠가 내게 그랬었다. 잠깐 화가 나서 홧김에 위선자라고 말했을 뿐인데 아빠는 나를 이해 못 한다고 여기는 실수를 했다. 나를 이해한 순간도 얼마나 많았는데. 그날 아빠의 단편만을 보고 아빠라는 사람 전체를 속단했다.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삐뚤어진 선택을 했다고 해서 내 삶 전체가 어그러진 것은 아니었는데 자해만이 내 인생의 전부를 설명하는 마냥 내가 걸어온 길을 속단했다.
아빠가 나에게 위선자라고 말하기 이전에 나를 이해해보려 노력했던 순간들이 분명 많았으리라. 내가 아빠에게 실망을 안기기 전에 평소에 늘어놓던 말들처럼 번듯하게 살아가려고 애썼던 순간 또한 많았으리라. 우리는 그 당시 그 사건 앞뒤로 깔려있던 노력과 애씀을 보지 않았다. 그저 현재 일어난 상황만을 바라보았다. 과정 중 하나였을 뿐인데.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수많은 전개 중 하나였을 뿐인데. 그 전개 하나만을 가지고 결말을 속단하는 실수를 했었다. 상황은 상황일 뿐 어떠한 상황이 곧 결말이 될 수는 없다.
#수치심을 아는 위선자
우리는 누군가 위선을 저지르면 흔히 지탄을 날린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옹호하고 싶다. 정확하게는 수치심을 아는 위선자들을 옹호한다. 그렇다. 나는 수치심을 아는 위선자들을 사랑한다. 위선을 저지르기 전 깔려있던 수많은 노고들을, 위선을 저지른 후 앞으로 더욱 행하게 될 수많은 노력들을 사랑한다.
수치심을 아는 위선자들은 자신이 말한 대로 살기 위해 분명 노력했을 것이다. 다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그 순간에 엇나갔을 뿐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한들 지금껏 쌓아 올린 그들의 노력이 모두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분명 반성을 거친 후에는 더욱 노력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무엇을 보고 그리 장담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붉어진 그들의 얼굴이 증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워하고 있지 않는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 더욱 발전하리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자만 있을 뿐이다. 오늘도 타인을 쉬이 속단하는 자들에게 묻는다. 과거의 나에게, 과거의 아빠에게 묻는다. 안 그래도 살기 각박한 세상, 서로 좀 너그러이 봐줄 순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