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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Oct 09. 2023

너는 엄마라도 있잖아

상대적 불행에 대하여 

중학생 때 친한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연이 끊긴 지 오래라 근황을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서로의 속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그 친구는 엄마의 부재라는 아픔이 있었다. 친구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집을 나가셨다. 남은 가족들은 어린 친구에게 현 상황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얼버무렸다. 친구는 몇십 년을 그렇게 알고 지냈다. 한 통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여보세요?"


"유진이니?"


"네. 누구세요?"


"유진아... 엄마야."


"엄마? 저는 엄마가 없는데요?"




다음날 친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두 눈을 꿈뻑이며 죽은 엄마가 살아 돌아왔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소리를 하였다. 내게는 좀 희한한 버릇이 있는데 바로 비극이 닥치면 조소를 띈다는 것이다. 혹은 박장대소를 하며 손뼉을 치기도 한다. 안 좋은 버릇인 건 알고 있다. 저게 지금 날 조롱하는 건가? 소시오패스여?(그럴 수도...) 오해를 받기도 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비극 앞에서 무력하게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 않았다. 우는 순간 왠지 그 비극이 진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현실은 현실이지만) 오히려 웃어젖히면 덜 심각하게 다가와서 마음이 한결 편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거지. 어쨌거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엄마가 살아 돌아왔다는 친구의 말에 '허'하고 풍선에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이 나온 건 사실이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감히 보태겠는가. 힘내라는 말이 되려 위선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걱정과 달리 친구는 빠르게 회복하였다. 일단 겉으로는 그래 보였다. 우리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아무리 큰 비극 앞에서도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엄마가 살아 돌아와도 여전히 학교에 나갔어야 했다. 해가 뜨고 밤이 오고, 친구의 시간은 며칠 전 전화에 멈춰있었지만 비정한 세상은 친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아픔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비슷한 결의 아픔은 결속력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공통 키워드는 '엄마'였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키워드만 공통일 뿐 상처의 결은 확연히 달랐다. 친구는 엄마가 그리웠고 나는 엄마가 지긋했다. 


어쨌거나 엄마라는 단어를 공유하는 사이였기에 결속력이 좋았다. 우리는 단번에 서로를 알아봤다. 아, 쟤라면 나의 아픔을 이해해 줄지도 몰라. 본능적으로 알았다. 서로의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낮에 해가 뜨면 친구는 나의 억울함을 들어주었고 밤에 달이 뜨면 나는 친구의 서러움을 들어줬다. 나는 낮에 머물렀고 친구는 밤에 머물렀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불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낮보다는 밤에 더 걸맞다는 것을. 적어도 남들 보기엔 그러하다는 점을 알아버렸다.




"그래도 너는 엄마라도 있잖아."


간밤에 엄마와의 다툼에 대해 말하던 중이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친구가 일침을 날렸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나, 지금까지 뭘 했던 거지? 얘 앞에서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소리를 해댄 건가?




"너네 엄마한테 잘해라. 자식 버리고 재혼하는 여자들도 수두룩 하다. 너네 어떻게든 키울라고 애쓰는데 첫째인 네가 잘해야지. 제야 네가 잘하면 네 동생도 다 잘하게 되어있다!"


내 아픔은 불행으로 단언하기엔 이프로 부족한 불행이었다. 엄마가 나와 내 동생을 버리고 재혼이라도 해야만 비로소 불행한 아이가 될 수 있었다. 나는 그야말로 불행 속 행운이었다. 엄마 아빠는 두 분 모두 자식이라면 만사를 제쳐둘 분들이었다. 서로 키우겠다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러니 나는 불행의 불자도 입에 담으면 안 됐다. 아니, 불까지는 가능했겠다. 어쨌거나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다투는 모습을 보며 컸고 엄마에게 일종의 학대를 당했으니 그래, 불 한 글자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 행까지는 어림도 없다. 그랬다간 문제없는 가정이 어디 있냐고 그래도 너 정도면 이혼 가정치고 복에 겨운 애라는 말이 날아왔으니까. 


하루는 아빠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아직 걷기 전 포대기 쌓여 있을 때 엄마와 아빠는 나와 함께 차로 이동 중이었다. 그 짧은 이동동안 다툼이 일어날 만큼 부모님의 갈등이 최고조로 빚고 있던 시기였다. 참다못한 아빠가 끼익 신경질적인 소리와 함께 차를 갓길에 세웠다. 두 분 다 차에서 내려 포대기에 싸여 고이 잠든 나를 두고 내 자식이네 아니네 각자 품으로 끌어당기며 옥신각신 싸움을 이어갔다. 


엄마와 아빠는 나란히 배구 선수단에 들었어야 했다. 두 분이 다투는 과정에서 포대기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비약을 좀 보태 공중에 날아다녔다고 한다. 협동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부부는 그렇게 그날 환상의 팀워크를 발휘했다. 결국 아빠의 패배로 끝이 났지만 그만큼 엄마 아빠는 나에 대한 애착이 강한 분들이었다. 




나 아픈데? 나도 아프다고!!


소용이 없었다. 나는 분명 어떠한 고통을 앓고 있었는데 남들은 하나같이 그 정도면 양호하다고 말했다. 너는 그래도 너를 끔찍이 여기는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시고 안락한 의식주마저 있지 않느냐. 세상에는 부모 없는 아이들도 있고 배를 곯거나 가정폭력을 겪는 이들도 있다고. 쭉 나열된 불행 중 네가 해당되는 게 뭐가 있냐고 했다.


없었다. 잘 먹고 잘 잤으며(엄마가 화난 날에는 못 잤지만 한 달에 몇 번 정도였으니 모두 가벼이 넘겼다.) 떨어져 있는 아빠도 간간이 안부를 전해왔다.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픔을 논하기엔 세상이 제시한 불행 기준에 적합하지 않았다. 


즉, 나의 불행은 상대적인 불행에 불과하였다. 




잠깐 내 얘기를 하자면 나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관심이 없다. 누가 어느 대학에 합격했고 어디 직장에 취직을 했고. 모두 아 그래? 하며 끝날 얘기들이었다. 남보다는 내가 중요했다. 어제의 나에 비해 오늘의 내가 뭐가 달라졌는지가 주요 관심사였다. 


한참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을 때는 상대적 불행이라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내 사촌동생은 비슷한 시기에 경제난으로 힘들어했는데 사촌 동생은 이모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 소통의 문제였다. 사촌 동생은 힘든 일이 생기면 이모에게 (나에 비해서) 편히 말하는 반면 나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엄마와 나는 불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인이 된 후 부모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보기 좋은 일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고 안 받고를 떠나서 털어놓을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은 위안을 받는다. 혼자서는 불안한 법이다. 


부러웠다. 똑같은 경제난에도 한쪽은 말할 곳이 있었고 한쪽은 있어도 있는 게 아니었다. 맞다. 확실히 이때는 부럽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뒤돌아서면 또 그뿐이었다. 워낙에 돈에 시달렸던 시기라 그나마 잠깐 부럽다고 느낀 거지 원래라면 그래? 잘됐다 하고 말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도 다 나처럼 사는 줄 알았다. 착각을 했던 것이다. 남의 불행에 위안을 받기도 혹은 절망을 느끼기도 한다는 사실을 중학생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내 얘기를 듣는 동안 친구 속이 얼마나 뒤틀렸을까. 본인은 엄마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데. 제야 쟤는 조잘조잘 불만도 참 많구나. 그렇게 티도 못 내고 끙끙 앓았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에 돌덩이가 앉은 마냥 무거워졌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이 친구에게 엄마 얘기를 자제하며 지냈다. 너는 엄마라도 있잖아 소리를 들었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또다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덧 서른에 가까워졌다. 경제난이 화두였던 나와 사촌 동생이 여느 날과 같이 돈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동생이 별안간 이런 얘기를 했다. 


"언니 앞에서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동생의 요지는 이러했다. 내 상황이 동생의 상황보다 심각해서 동생이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기가 민망하다는 것이었다. 간간이 내 말투에서 부러움이 묻어 나와서(티가 났다니. 젠장) 더 편하게 말하기가 좀 그랬나 보다. 아. 갑자기 십 년 전 연이 끊긴 옛 친구가 생각났다. 




유진아. 


네 마음을 알 것 같아. 상대적 불행이라는 건 이런 거였구나. 하지만 난 여전히 내 동생이 내게 푸념을 늘어놓았으면 좋겠어. 물론 가끔씩은 비교가 되어 초조해지기도 하지만 이런 내 상황과 별개로 동생에게 나라는 존재는 언제든지 무슨 말이든 편히 할 수 있는 존재였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커. 


네 마음도 존중해. 그냥 나는 이런 사람인 것 같아. 당시에는 그러니까 우리가 인연이 끊기기 직전 즈음에는 잘잘못을 따지곤 했잖아. 서로 비슷한 상처를 위로하다 가까워지고 그 상처를 이해하지 못해서 멀어졌단 말이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각자의 불행만을 생각하느라 또 다른 불행을 만들어냈던 것 같아. 


잘 지내고 있지? 지금쯤이면 너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해 줄 사람이 옆에 있으리라 생각해. 


잘 지내.




최근 나는 솔로라는 연애 프로그램에서 '파란만장'이라는 단어가 화제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쉽게 남의 불행을 판단하곤 한다. 그 옆에 내 불행을 슬며시 세워놓고 둘을 비교하며 음, 이만 하면 내가 낫군 하면서 위안을 얻기도 혹은 쟤는 별 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이라며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교에는 일종의 착오가 있는데 바로 자신의 불행을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불행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나의 불행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불행처럼 보인다. 내 일은 심각하지만 남의 일은 가벼운 법. 내 불행은 가벼이 여기고 타인의 불행을 중히 여긴다면 불행과 불행이 만나 또 다른 불행을 낳는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랬다면 친구도 내게 '너는 엄마라도 있잖아'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 또한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친구야 힘들지? 옆에 있어 줄게. 너도 힘들지? 나도 있어줄게. 이렇게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밀려오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이제는 기억 너머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옛 친구의 안부를 바라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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