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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Oct 12. 2023

동생을 버린 언니(1)

겨울에서 도망쳐 여름에 다다른 날

우리 엄마 기준으로 내가 동생을 버린 적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열 일곱살이며 또 한 번은 이 십 대 초반의 어느 명절이다. 열일곱 살 때의 사연은 이러하다. 




#이제야가 첫 번째로 동생을 버린 순간, 열일곱


열여섯의 끝자락. 고등학교에 입학을 앞둔 나이였다. 내신을 챙긴다는 구실로 준비했던 외고 대신 일반고로 진학할 예정이었던 나는 입학 후 치를 중간고사에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겨울 방학 내내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당하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매섭도록 불어오는 춥디 추운 겨울날이었다. 


엄마랑 크게 싸웠다. 늘 있는 일인지라 크게 개의치 않아 했는데 엄마는 아니었나 보다. 굳은 결심을 한 듯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아빠에게 가라고, 너 이럴 거면 나는 너 못 키운다고. 등을 떠밀었다. 필요한 짐을 챙기려 했지만 그 작은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현관문 밖이었고 오른손에는 뒤죽박죽 아무렇게나 쑤셔 박은 짐들이 담긴 캐리어가 들려있었다. 


아빠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몇 달 후 다시 엄마에게 돌아왔다. 입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엄마에게 내가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하니 더 이상 학원을 늘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아빠는 엄마를 몰라도 한참을 몰랐다. 바로 다음 날 나는 국어 학원을 하나 더 등록했고 또 바로 다음 날 등교하던 엄마 차 안에서 크게 다퉜으며 마침내 세 번째 날로 접어드는 새벽, 집을 나갔다. 




가출하기 하루 전 날 작은 방에서 동생과 함께 잠을 청했다. 동생의 침대는 일인용이라 두 명이 눕기에는 좁은 편이었는데 그날은 꼭 함께 잠에 들고 싶었다. 어둠이 내린 밤 우리는 한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웠다. 색색거리는 동생의 숨소리만이 들려오는 고요한 한밤중이었다. 


눈물이 났다. 


오늘이 같이 잘 수 있는 마지막 날이구나. 앞으로 적어도 몇 년 간은 함께 잠들 날이 없겠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나부터 찾을 텐데. 언니 집 나갈 거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간식 사 와서 또 한 바가지 부어줘야 하는데. 그때 나는 학교를 마치면 바로 슈퍼로 뛰어가곤 했었다. 까만 비닐봉지에 나와 동생이 좋아하는 먹거리를 한가득 담아서 집으로 가면 나보다 먼저 도착한 동생이 내복바람으로 뛰어나왔다. 그러면 나는 신발을 체 벗기도 전에 현관문 앞에서 비닐봉지를 거꾸로 뒤집어 우수수 과자를 바닥에 쏟아내었고 올망올망한 눈망울로 이를 본 동생은 꺅꺅 두 손뼉을 치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어댔다. 오물오물. 작은 두 손으로 과자를 집어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꿀꺽. 


목구멍에 가득 차오른 울음을 삼켜내었다. 




새벽 다섯 시. 


엄마와 동생이 모두 잠들었다. 짐은 저녁즈음에 몰래 챙겨두었다. 띡, 띠리릭.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어본다. 그 순간 새벽 공기의 차가운 바람이 휙, 얼굴에 부딪혀 왔다. 한 겨울이라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사방이 깜깜했다. 현관에 우뚝 서서 어둑한 어둠을 마주하자니 덜컥 겁이 났다. 다시 침대에 누울까? 뒤를 돌아봤다. 우리 집. 집의 풍경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곳곳에 엄마와 다툰 흔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식탁에서, 부엌에서, 베란다에서. 


집이 더 무섭다. 눈앞에 펼쳐진 어둠과는 또 다른 두려움이었지만 차라리 암흑을 선택하는 것이 났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동이 트지도 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가자. 딱 한 번 뒤돌아봤으니 이제 다시는 돌아보지 말자. 나가자. 




나는 정확히 일주일을 채웠다. 처음에는 그저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알게 된 남자아이가 내 처지를 듣고는 자신의 아버지 집에 가 있는 게 안전하지 않겠냐고 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혼자 지내고 계셨다. 지금 생각하면 겁대가리 없는 짓이었지만 이미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간땡이가 땡땡 부어있었기 때문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아저씨는 나를 덤덤히 맞이해 주셨다. 일단 푹 쉬라고 하셨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집안에 고여있는 나와 달리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다 일주일 즈음 됐을까. 아저씨가 내게 마음을 좀 추슬렀다면 이제 부모님에게 연락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주신 듯했다. 후에 남자아이에게 들은 말이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간 뒤, 제야가 없으니 집이 썰렁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공중전화로 향했다. 심호흡 한번 후 내뱉고 챙겨 온 동전을 달그락달그락 천 원어치 넣었다. 신호가 울리기 무섭게 달칵. 통화가 연결되었다. 


"아빠."


"제아야. 너 어디니?"


"아빠, 나 하나만 약속해 줘."


"그래 제아야, 아빠 듣고 있다. 어서 말해봐."


"이번엔 엄마한테 안 보낸다고 약속해."




해방이다! 드디어 박 씨 가족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이 주어졌다. 아빠는 엄마에게 나를 한번 돌려보낼 때 내 마음을 돌볼 것을 당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말을 깡그리 무시했기 때문에 더는 나를 돌려달라 말할 명분이 없었다. 아니 박 씨 가족에게 사실 명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더 몰아붙였다간 두 번 다시 나를 찾지 못할 두려움에 일단 한발 후퇴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드디어 내 성과 같은 이 씨 가족의 바운더리에 속하게 되었다. 몇 년 만에 만난 아빠가 다소 어색하긴 했어도 박 씨보단 이 씨가 훨씬 편안했다. 


아빠는 나랑 둘이 살 집을 구했고 그 근처에 사진관을 얻어 운영했다. 아침에 아빠를 배웅한 후 해가 질 때까지 집안에 콕 틀어박혀 있자면 어느새 아빠가 돌아왔다. 그때 나는 일 년 동안 은둔 생활을 했는데 하루종일 밖을 나가지 않아도 전혀 답답하지 않았다. 학교에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고 혹시라도 아는 이를 만날까 최대한 자제하고 싶었다. 집 앞 슈퍼가 유일한 외출이었고 지칠 대로 지쳤던 터라 그저 먹고 자는 일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한 나날을 보내던 중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받지 말까. 잠깐 망설이다 이내 전화를 받았다. 어디냐고 물었다. 아빠집이라 했다. 밥은 먹었냐고 마저 물어왔다. 컴퓨터 앞에서 라면과 김밥을 먹고 있었다. 왜 그런 걸 먹냐고 지금 아빠 동네인데 잠시 나오라고 했다. 


왜? 


왜 또 여기까지 온 거야?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불안함을 느끼며 아빠 사진관으로 향했다. 아빠와 내가 어디 사는지 둘 다 일언반구 한 적이 없었는데 엄마는 기가 막히게도 정확한 위치로 찾아왔다. 내가 도착했을 즈음엔 이미 소동이 벌여져도 단단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외할머니까지. 동네가 떠나가라 고성이 오고 갔다. 무슨 일이지? 사태 파악을 마저 하기도 전에 엄마 손에 들린 하얀색 종이를 보고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편지였다. 내가 쓴 편지. 가출 당시 나를 도왔던 남자아이에게 전하려다 미처 전달하지 못한 편지였다. 오 마이 갓. 엄마는 그 편지를 아빠 눈앞에 펄럭이며 네가 자식을 이렇게 키웠다며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아. 눈앞이 핑 돌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여름날이었다. 맴맴 울리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터벅터벅 걸어온 내 앞에 더는 감당하지 못할 폭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라는 폭염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혼절해 버렸으면. 아니 수증기가 되어 무더위에 증발이라도 해버렸으면. 


엄마는 건수를 잡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아빠를 내게서 데려올 건수. 가출 후 돌아왔을 때 아빠랑 살기로 결정됐지만 그전에 아빠와 엄마 사이를 몇 번 왔다 갔다 했어야 했는데(엄마 집에서 짐도 챙겨야 했고. 아무튼 정신이 없었다) 허술해도 한참 허술했던 내가 엄마 집 어딘가에 편지를 두고 온 일이 이 사달을 만들었다. 


여기서 잠깐. 그 남자 아이랑 사귀었던 거였어?라고 묻는다면 이걸 사귀었다고 표현해야 하나 싶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는 게 맞을 것 같다. 허. 당신 이제 보니 어릴 때부터 발라당 까졌군요?라고 또 묻는다면 그래요, 제가 조신한 아이는 아니었어요 대답하고 마련다. 


아니 여긴 그나마 내 공간이니 잠깐 내 얘기를 해 볼 수 있으려나. 열일곱의 내가 그때 당시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가슴속에 묻었던 말들을 용기 내어 꺼내보고자 한다. 


나는 예뻤다.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도 아니고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잠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사족을 붙인다. 세월의 풍파를 직격타로 맞은 지금은 그 눈부셨던 어여쁨을 찾아보기 힘들지만(아. 옛날이여) 저 시절의 나는 어쨌거나 예뻤다. 누구나 나를 보면 첫마디가 아이고 예뻐라 하며 호의를 보이곤 했었다. 


가정 내 결핍이 있는 청소년기의 예쁨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외모는 또래 남자아이들의 시선을 끌었고 자연히 내게 내미는 손들이 많았다. 이 뒤로는 너무 뻔한 얘기라 굳이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가출 당시 나를 도왔던 남자아이는 내 속 안의 결핍을 알아보았고 나는 그저 누구라도 나를 알아준다는 생각에 마음을 홀라당 내어주었다. 그러니 발라당 까졌다는 세간의 시선에 


아니에요! 저는 단지 온기가 필요했어요. 물론 어른들의 눈에 부적절해 보였다는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온기가 필요했다는 제 말은 정말 진심이에요!라고 아무리 외쳐봤자 당장에 내 엄마부터 나를 소위 말하는 남자에 미친년 취급을 하는데 남들이야 나를 알아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그랬었다. 어느 순간 나는 외가에서 남자에 미쳐서 집을 내팽개치고 뛰쳐나간 몹쓸 자식이 되어버렸다. 분명 나를 등 떠밀어 처음 집에서 나가게 한 건 엄마였는데. 그 후 제 발로 집을 나설 때도 그 아이를 보려고 나간 건 절대로 아니었는데. 억울했다. 진실로 엄마가 지긋해서 감행했던 가출 신화가 어느새 와전이 되어도 단단히 와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외가에 내 목소리를 높이기엔 이미 너무 지쳐버린 후였다. 요란통이었던 어느 날에는 엄마가 내 통화 내역을 떼본 적이 있었다. 그 남자아이의 번호가 많았다. 프린트된 종이 뭉치를 내 얼굴 앞에 집어던지면서 남자가 그래 좋더냐고 외치던 날, 두 손 두 발 다 들며 학을 뗐다. 


지쳤다. 


더 이상 이 더위를 견딜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엉뚱하게도 비의 <태양을 피하고 싶었어> 노래가 떠올랐다. 아빠한테 도망쳐왔건만 여전히 태양은 내 머리 위에서 나를 찢을 듯이 강렬히 내리쬐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어디를 가든 넌 이 폭염 속에 사정없이 갇히고 말 거야.


세찬 바람이 몰아치던 한 겨울날, 집을 나오며 영영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건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길 바랐는데. 그러기엔 여름 한낮의 태양이 나를 환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나도 무력했던 나는 뚝뚝 녹아 흘러내리는 나 자신을 지켜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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