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4

그대로의 소소한 행복

by 김작가입니다

1. 봄이 오는 듯하더니 다시 겨울로 갔다가, 봄은 건너뛰고 바로 여름이 되는 이상한 계절을 경험하고 있다. 공기는 포근한데 구름이 많이 껴서 흐리거나, 해는 쨍한데 옷을 뚫고 들어오는 차가움이 느껴지는 그런 계절이다. 올해는 유달리 경건한 자세로 벚꽃을 마주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을 보면서 마음이 부들부들할 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았다. 봄을 마주한 얼마동안은 머랄까 이른 새벽 강 위에 피어 오른 물안개 마냥 초옥 하고 차분하게 깔려있는 날이 지속되었다. 우울하다거나 슬픈 감정도 아니었다. 왜 이리 텐션이 안 올라가지, 왜 이러지 고민을 해봤지만 이렇다 할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만만한 게 호르몬이고 날씨니 괜히 탓을 하면서 안개와 같은 내 상태를 합리화시켜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그냥 핑계였다. 에이 모르겠다, 안개는 언제고 걷히겠지 싶어 그냥 그대로의 나를 가만히 두기로 했다.


2. 어제는 H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신이 겨울 동안 왜 힘들었는지, 약을 먹어야 할 정도의 우울증이 왜 생겼는지 이유를 알았다며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얘기했다. H의 목소리만 들으면 왠지 유레카를 외쳐야 할 텐션이었지만 나는 그게 H의 진짜 감정이 아니란 걸 알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H의 목소리엔 사뭇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한 것 같다. 차분함 속에 감춰진 긴장감으로 자신이 힘들었던 이유를 얘기하더니 H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면서 떨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서럽게 울었다. 쌓여있는 서러움과 힘듦, 억울함, 원망이 한 덩어리가 되어 속에서 굴러 나왔고 그제야 자신을 마주한 H는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옆에라도 있었으면 휴지라도 건네주고 안아주기라도 할 텐데 그거면 됐을 텐데 전화기 너머로 하고 있는 말이 '울어라, 실컷 울어라, 울어야 한다, 울고 싶을 땐 참지 말고 울어야 한다.'뿐이었다.


3. 쩡언니는 오늘 가슴이 답답해서 그냥 차를 끌고 나와 카페에 들어갔다고 했다. 가슴이 답답할 이유는 어디에나 있었다. 쩡언니의 말에 김간은 잘했다며 바람 쐬고 싶을 때 쐬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소박한 행복감을 꾸준히 누리며 살자고 서로에게 줄 수 있는 토닥을 전했다. 언니들 하고의 대화는 참 별게 없다가도 깊고, 한 없이 깊다가도 또 가볍고, 추운 겨울 뜨신 방에서 귤 까먹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 슬프면 슬픈 대로,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무겁든 가볍든 그대로의 시간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


4. 글을 적다 보니 H와의 관계에서도 늘 그래왔다. 날씨가 좋아 생각이 났다며 전화를 걸어 그 얘기만 하고 끊는다거나, 대뜸 전화해서 밥은 먹었는지 묻고, 이쁜 카페를 발견했는데 꼭 같이 가자며 마치 무지개 같은 설레는 말을 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한없이 회색 빛이 드리우는 날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김간이 말한 소박한 행복이라는 것이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에 가고, 좋은 것을 보는 것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울고 불고 하며 그대로의 시간을 보여주는 것도 그래서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며 나누는 그 시간도 서로와 각자에게 소박한 행복을 줄 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5. 그럼 지금 나에게 소박한 행복은 무엇인가? 어제, 오늘 일을 하면서 이러다가 내 손과 눈은 활자에 파묻혀 질식사하겠지 싶을 정도의 활자를 마주했지만, 내 손가락은 또 자판 위에 올려져 글을 쓰고 있고 눈은 침침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또 글을 보고 있다. 사람은 참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잘 찾아가는 것 같다. 글을 마무리하고 이제 다른 행복을 찾아서 가야겠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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