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 날씨보다 더 뜨거웠던 그곳의 정(情)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를 나온 후 종종 내 삶이 심심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전공, 지역, 관심사 등 공통점을 가진 사람만 주변에 남아 변화를 느낄 수 없었으니까. 애써 맞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잘 통하는 게 편했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도 나눌 대화가 확연히 그려져 아쉬웠다.
이곳은, 그 아쉬움을 날려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 어학원에서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건 무작위로 이루어진 만남 그 자체였으니까. 그저 이 시기에 여기에 모였을 뿐, 각자 출신과 경험이 다 달랐으니까. 누군가는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누군가는 쉬기 위해, 누군가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다양한 이유로 이곳을 방문했고, 어학원에 머무르는 기간도 다 달랐으니까. 마치 브루마블에서 주사위를 던져 우연히 잠시 같은 곳에 도착한 것처럼.
그럼에도 서로 친해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고. 연결고리만 있으면 언제든 가까워질 수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사람 냄새가 나니까.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서로 어디서 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몰랐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졌다. 시간이 갈수록 정이 쌓였고, 서로에게 힘과 의지가 됐다.
그렇게 두 달 사이 많은 정이 오고 갔다. 한국 음식 잘 못 먹는다고 서비스로 부침개를 내주는 단골 카페가 생겼고, 아플 때 옆에서 서로 약과 죽을 챙겨주고. 로비에서 생일 파티하는 걸 보고 같이 노래를 불러줬다 케이크를 받기도 하고, 마주칠 때마다 편하게 안부인사를 주고받고.
그래서였을까, 이곳에서 마주하는 이별은 유독 어려웠다. 헤어진다는 아쉬움에,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불확실함이 더해져. 처음 룸메를 떠나보낼 때도,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친구가 먼저 떠날 때도, 내가 호주로 떠나야 하는 순간도.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조금이나마 추억을 더 쌓는 것 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고, 인스타 친구가 되고,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고, 대화를 나누고, 인사를 나누고.
여전히 이별은 힘겨웠지만 함께한 추억이 있어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다, 다시 볼 그날을 기약하며.
짧은 순간 짙은 농도로 친해졌던 그 시절 추억이 담긴 곳. 만남은 반가웠고, 헤어짐은 버거웠던 곳. 짙은 아쉬움을 추억으로 덧칠했던 그곳.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곳, 그게 세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