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그런 룸메가 생겼다.
어느새 세부에서 남은 날보다 지낸 날이 더 많아졌다. 떠날 날이 다가오며 여기 생활을 조금씩 정리하고, 호주 갈 준비를 시작했다. 사실 준비라는 말만 거창했지, 크게 할 건 없었다. 프로 J답게 은행 계좌라던가, 호주에서 필요한 것, 알아야 할 정보 같은 건 어느 정도 한국에서 준비 다 하고 왔으니까. 그럼에도 큰 산이 하나 남아있었다.
호주에서 살 집 구하기. 한국에서 몇 번이나 집도 구해봤고, 호주에서 집을 어떻게 구하는지 알아보고 왔지만 시간 내에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 꽤 부담스러웠다. 호주에 도착하고 코스를 시작할 때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딱 일주일이었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나만 불안한 게 아니었다는 것. 나랑 같은 코스를 듣는 사람 모두 다 같은 마음이었다. 덕분에 우린 자연스레 '호주 집 구하기'를 주제로 정보를 나누고, 삼삼오오 모여 같이 집을 알아보곤 했다.
물론 나도 그랬고. 가깝게 지내던 언니 A와 그 언니의 룸메이트 B와 셋이 매일 수업이 끝나면 카페에 모여 집을 알아봤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달랐던 게 있다면 같이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 몇몇은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같이 살 집을 알아봤지만 우린 다 혼자 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이 집 조건은 어떤지, 수업 듣는 곳에 가기 괜찮을까? 그런 이야기만 나누었다.
그런데 언제나 바람과 현실은 다르게 흘러간다고, 우리 앞에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게 없다는 것. 조건 하나를 맞추면 꼭 다른 게 안 맞았다. 독방으로 구하려니 터무니없이 비싸고. 예산에 맞추면 교통편이 너무 멀거나 창문이 없고. 2인 1실에 들어가려 해도 한 명만 구하는 곳은 거의 없고. 그 과정을 3일 정도 반복하니 서서히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냥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할 때쯤 B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린, 호주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
우리가 같이 살게 된 과정은 뜬금없지만 막상 집을 알아보고 구하는 과정은 오래전부터 계획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서로 원하는 조건이 비슷하기도 했고, 전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으니까. 틈만 나면 방을 찾아보고, 둘 다 마음에 들면 연락해 보고.
그 과정을 5일 반복하고 우린 마음에 쏙 드는 집을 구했다, 행운처럼. (사실 당시엔 직접 보지 않고 계약금을 거는 게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건 나중에 풀어보기로.)
당시 B와는 몇 번 이야기를 나누고, 단체로 같이 놀러만 갔을 뿐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다. 처음 B와 함께 카페를 간 것도, 같이 시간을 보낸 것도 당시 B의 룸메이트였던 A 때문이었으니까.(집을 구하던 시기 A와 자주 붙어 있었다.)
그랬던 B와 함께 살기로 한 건 정작 그 적당한 거리감 때문이었다. 그때 난 매일 누군가와 붙어 있는 게 힘들었으니까. 너무 남 같지 않으면서 또 너무 가깝지 않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서로 선은 지키면서 공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함께, 또 따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실제로 우린 호주를 떠날 때까지 작은 싸움 한 번 없이 재밌게 잘 지냈다. 처음엔 서로가 조심스러웠고, 가까워진 다음에는 성향이 비슷해 크게 부딪힐 일이 없었다. 둘 다 ‘뭐든 같이 해야 해’가 아니라 서로 터치하지 않으면서도 또 같이 즐길 수 있는 상황이 많았달까. 호주에서 우린,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지가 되는 그런 사이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 룸메가 B였던 건 행운이었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큰 행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