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느낌 그대로, 홀딱 반해버렸어요.
나는 항상 느린 사람이었다. 마음을 열고 '나'를 보여주는 데도, 뭔가를 마음에 담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사람. 그래서 내게 '첫눈에 반한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믿기 힘든 말이었다. 그런 내가 2,813 km나 떨어진 곳에서 이렇게 쉽게 마음을 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기대치가 없던 세부에서.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부 자체에 기대가 없었을 뿐, 해외생활 그 네 글자에 기대를 꾹꾹 눌러 담아 환상을 가득 채웠으니까. 해외만 가면 평소의 내가 하지 않았을 일을 할 용기가 샘솟고, 외국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 속에 나도 있을 것만 같았달까. 한 마디로 해외에서 멋진, 달라진 나를 꿈꿨다. 어쨌든 그 환상 덕분에 운명의 장소를 세부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많은 걸 포기하고 참았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던 곳. 짧은 두 달 동안 오래된 단골처럼 몇 번이나 방문했던 곳, 재즈바.
한국에선 술도 거의 안 마셨던 내가 시간이 나면 재즈바에 달려갔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이어질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 해외에 오면 평소에 내가 하지 않던 일을 꼭 해봐야지 하고 다짐하던, 외국스러운 곳에 갈거라 노래 부르던 나한테 이렇게 딱 맞는 곳은 없으니 말이다. 심지어 처음 외출했을 때, 이 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재즈바에 가게 된 건 필연 같달까.
'색소폰, 재즈, 바'. 이 조합은 어디선가 본 듯한 간판과 달리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으니까. 첫눈에 들어온 이국적인 간판에, 안이 보이지 않는 인테리어까지 더해지니 자연스레 이곳에 더 끌렸다.
정확히는 내부가 보이지 않으니, 이 공간이 어떨지 상상하는 재미가 좋았다. 이곳에 들어가면 라라랜드 재즈바 같은 모습이 펼쳐지지 않을까? 비밀의 아지트처럼 색다른 공간에 발을 들이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기대감과 설렘으로 내 마음대로 이 공간을 그려보는 게. (내 바람에 가까운 상상이었지만 그때의 난 진지했다.)
이 공간을 그려보며 실제로 이곳이 내 상상과 얼마나 닮아 있을지, 꼭 확인하고 세부를 떠나야겠단 다짐도 같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기대감, 호기심 그 모든 걸 눈으로 생생하게 마주한 날, 나는 다시 한번 재즈바에 빠져 들었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끝날 법도 한데, 시간을 억지로 내 들렸던 이곳의 매력은 뭐였을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재즈바였는데, 무엇에 마음을 열었는지.
그럼에도 확실한 건 난 이 공간을 특별하게 여겼다는 것. 내 나름대로 이곳에 의미를 많이 부여해서 더 그래서 느꼈나 싶기도 하고. 평소 내가 하지 않았던 일을 시도했다는 만족감, 긴장감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 내 인생 첫 재즈바였단 사실, 바쁜 일상 속 여유를 찾을 수 있던 공간. 많은 것에 특별한 의미를 담았으니.
그리고 그곳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노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그 노래에 맞춰 자유로이 춤을 추는 관객들, 서로 흥을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그 모든 게 어우러져 자연스레 행복과 즐거움이 묻어 나왔달까.
그래서 나도 그 속에 녹아들고 싶었다. 그때의 재즈바는, 매번 진지하고 잔잔한 나도 계속 웃게 만들던 신기한 곳이었으니까. 여기에 있던 순간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즐기고, 웃을 수 있었으니까.
문 하나를 통과하면 홀가분하게 여유롭던, 나는 그곳을 꽤 많이 깊게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