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차고 망고주스가 맛있던 그곳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세부에 지낸 시간이 2자리가 넘어가며 어학원 생활도 익숙해졌다. 이젠 식당 메뉴만 봐도 맛을 예상할 수 있고, 시간표를 보지 않아도 강의실을 자연스레 찾아가고, 수업하는 선생님과도 친한 친구처럼 이야기하고. 일어나서 아침 먹고 수업 갔다가, 또 점심 먹고 수업 듣고, 좀 쉬다 저녁 먹고, 공부하거나 좀 떠들다 마무리하는 하루.
처음에야 새로웠지, 어느새 내 하루는 특별함은 사라지고 일상만 남았다.
이곳이 일상처럼 느껴진다는 건 내가 잘 적응하고 있단 뜻일 텐데 그때의 난 그 익숙함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 익숙함을 받아들이면 해외에 나와 있다는 걸 잊고 또 그냥 하루하루 살아갈 것 같아서, 해외에 대한 기대가 사라질 거 같아서. 그저 흘러가는 하루가 아니라 나는 해외에서 다시없을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매일 그렇게 느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매일이 특별하길 바랐던 건 지극히 해외 초보다운 생각이었지만.
'하루를 특별하게 보내고 싶다, 해외에 있다는 걸 만끽하고 싶다', 그 순진하고도 진지한 바람으로 시작된 필리핀을 느낄 수 있는 것 찾기. 필리핀을 느끼는 것, 너무나 단순하고 뻔하지만 이것만큼 내가 해외에 있단 걸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수소문한 내게 남은 건 스노클링, 호핑투어, 가와산, 쇼핑몰, 야시장.
물이 무서워 바다에 못 들어가는 쫄보, 쇼핑에 1도 관심이 없는 내게 남은 선택지는 야시장뿐이었다.
필리핀스러운 경험이 목적이었던 만큼 야시장에라도 가보기로 했다. 야시장 이름도 정확히 모르고, 뭘 파는지도 모른 채 그저 IT파크 근처에 있다는 말만 듣고 나선 길. 기대가 없었던 덕분일까, 야시장 가는 길은 꽤 재밌었다. 가는 길이 다 처음 가본 곳이라는 게. 길거리가 시장 같은 곳을 지나갔다가 신도시가 늘어선 거리를 지나갔다가 계속 풍경이 바뀌는 게. 그렇게 약 30분을 걸어 도착한 야시장.
우리를 맞이한 건 많은 인파였다. 분명 길 건너면 야시장이야 할 때만 해도 '이곳에 야시장이 있다고?' 말할 만큼 한적한 느낌이었는데, 야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났다. 평소엔 시끌벅적 소리에 질색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공간이 활기차게 느껴져 나도 빨리 그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들어간 야시장은 발 디딜 틈도 없고, 앉을자리도 쉽게 찾을 수 없었지만 시끄러움 속에도 밝은 분위기가 묻어나 좋았다. 단조로운 생활에 생기가 더해지는 느낌이랄까. 사실 특별한 건 없었다. 먹거리, 기념품, 일행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 어느 야시장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게는 가장 필리핀스러운 곳이었다. 지인들에게 줄 기념품을 사고, 현지인과 어우러져 어디가 맛있을까? 돌면서 둘러보고, 긴 줄을 뚫고 망고 주스를 사 먹고.(줄이 길어서 인기가 많나하고 사먹어 봤는데 진짜 맛있었다.) 특별한 걸 안해도 그곳에 머무는 자체로 현지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느낌이었달까. 그 순간만큼은 지금 해외에 있단 걸, 특별한 순간을 보내고 있단 걸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계산도 없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를 배경 삼아 그날 나도 필리핀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