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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여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요?

처음 느낌 그대로, 홀딱 반해버렸어요.

by 유하 Sep 15. 2024

나는 항상 느린 사람이었다. 마음을 열고 '나'를 보여주는 데도, 뭔가를 마음에 담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사람. 그래서 내게 '첫눈에 반한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믿기 힘든 말이었다. 그런 내가 2,813 km나 떨어진 곳에서 이렇게 쉽게 마음을 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기대치가 없던 세부에서.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부 자체에 기대가 없었을 뿐, 해외생활 그 네 글자에 기대를 꾹꾹 눌러 담아 환상을 가득 채웠으니까. 해외만 가면 평소의 내가 하지 않았을 일을 할 용기가 샘솟고, 외국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 속에 나도 있을 것만 같았달까. 한 마디로 해외에서 멋진, 달라진 나를 꿈꿨다. 어쨌든 그 환상 덕분에 운명의 장소를 세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어학원에서 1분 거리에 있던 재즈바어학원에서 1분 거리에 있던 재즈바


많은 걸 포기하고 참았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던 곳. 짧은 두 달 동안 오래된 단골처럼 몇 번이나 방문했던 곳, 재즈바.


한국에선 술도 거의 안 마셨던 내가 시간이 나면 재즈바에 달려갔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이어질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 해외에 오면 평소에 내가 하지 않던 일을 꼭 해봐야지 하고 다짐하던, 외국스러운 곳에 갈거라 노래 부르던 나한테 이렇게 딱 맞는 곳은 없으니 말이다. 심지어 처음 외출했을 때, 이 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재즈바에 가게 된 건 필연 같달까.


'색소폰, 재즈, 바'. 이 조합은 어디선가 본 듯한 간판과 달리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으니까. 첫눈에 들어온 이국적인 간판에, 안이 보이지 않는 인테리어까지 더해지니 자연스레 이곳에 더 끌렸다.


정확히는 내부가 보이지 않으니, 이 공간이 어떨지 상상하는 재미가 좋았다. 이곳에 들어가면 라라랜드 재즈바 같은 모습이 펼쳐지지 않을까? 비밀의 아지트처럼 색다른 공간에 발을 들이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기대감과 설렘으로 내 마음대로 이 공간을 그려보는 게. (내 바람에 가까운 상상이었지만 그때의 난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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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느라 몇 없는 재즈바 공연 사진


이 공간을 그려보며 실제로 이곳이 내 상상과 얼마나 닮아 있을지, 꼭 확인하고 세부를 떠나야겠단 다짐도 같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기대감, 호기심 그 모든 걸 눈으로 생생하게 마주한 날, 나는 다시 한번 재즈바에 빠져 들었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끝날 법도 한데, 시간을 억지로 내 들렸던 이곳의 매력은 뭐였을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재즈바였는데, 무엇에 마음을 열었는지.


그럼에도 확실한 건 난 이 공간을 특별하게 여겼다는 것. 내 나름대로 이곳에 의미를 많이 부여해서 더 그래서 느꼈나 싶기도 하고. 평소 내가 하지 않았던 일을 시도했다는 만족감, 긴장감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 내 인생 첫 재즈바였단 사실, 바쁜 일상 속 여유를 찾을 수 있던 공간. 많은 것에 특별한 의미를 담았으니.


그리고 그곳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노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그 노래에 맞춰 자유로이 춤을 추는 관객들, 서로 흥을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그 모든 게 어우러져 자연스레 행복과 즐거움이 묻어 나왔달까.


그래서 나도 그 속에 녹아들고 싶었다. 그때의 재즈바는, 매번 진지하고 잔잔한 나도 계속 웃게 만들던 신기한 곳이었으니까. 여기에 있던 순간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즐기고, 웃을 수 있었으니까.


문 하나를 통과하면 홀가분하게 여유롭던, 나는 그곳을 꽤 많이 깊게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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