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같고, 오늘도 같다? 아니,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세부에 있는 동안 가장 느끼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계절의 변화였다. 사계절로 살아온 나한테 이곳은 그저 여름, 여름, 여름 같았다. 심지어 8월 말에 세부에 도착해, 한국에서부터 여름이 이어진 느낌이었달까. 그래서일까, 머리로는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걸 느껴도 벌써 9월이란 게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마치 어제도 같았고, 오늘도 같고, 내일도 같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내가 계절 변화를 느꼈다. 어학원 선생님의 옷차림으로. 누가 더 짧은 옷을 입나 대결하듯 더위를 피해보려는 우리와 달리 선생님의 옷차림은 어느 순간 길어졌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들에겐 어느새 반팔만 입기엔 추운 날씨였다. 신기한 건 그들은 추운 날씨를 싫어하면서도 그 날씨를 반겼다는 것. 바로 크리스마스 때문에.
장마와 무더위를 합친 날씨, 9월, 크리스마스. 이 세 가지가 한 번에 존재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세부에선 가능했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조합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그들 앞에선 의미가 없었다. 내가 본 그들은 누구보다 크리스마스에 열정적이었으니까. 그들은 옷차림이 길어지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 하나로 설레했다.
물론 어학원 선생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크리스마스를 느낄 수 있었다. 마트엔 크리스마스 장식 코너가 생겼고, 쇼핑몰엔 캐럴이 계속 흘러나왔고, 가게엔 크리스마스 장식이 보였다. 며칠 사이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는 게, 이렇게 크리스마스에 진심이란 게 놀라웠다.
나한테 크리스마스는 그냥 쉬는 날 중 하나였으니까. 굳이 의미를 찾자면 좋은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 정도였달까.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더 궁금했다. 약 4개월이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건 어떤 마음일까, 그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하고.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느낀 건 나한테만 9월에 시작된 크리스마스가 특별한 풍경이었을 뿐, 그들에게는 하루 세끼를 먹듯 당연한 느낌이었다. 어제 마트에 갔다가 크리스마스 꾸민 걸 봤다는 말 한마디에,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 걸 보면. 필리핀에서 큰 휴일 중 하나고,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만큼 점점 더 크리스마로 가득 찬 풍경을 보게 될 거라고, 곳곳에 행사나 즐길 거리도 많을 거라고. 그 말을 하는 모습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그 모습을 보면서 10월 말에 세부를 떠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아쉬웠다. 그 행복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없단 게. 동시에 호주 크리스마스가 기대됐다. 그곳의 크리스마스는 어떤 모습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