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든 괴롭힘에 대한 생각들
지난 1월 아산 세계 꽃 식물원에서 받은 로즈메리가 점점 말라가고 있어서 햇빛을 좋아하는 식물을 밖에도 내놓을 겸 집을 나섰다. 식물원에서 잘 자라던 식물은 생기를 잃고 힘이 없어 보였다. 아마도 원래 살던 식물원 안은 밝고 촉촉했는데 한별이가 사는 환경은 채광이 안 좋기도 하고 건조하다. 추운 겨울 멈춰서 있던 자전거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주인이 한동안 찾지 않은 무심함을 고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나가보자!
3월의 초순 아직은 공기의 쌀쌀함이 남아있지만 Y공원에는 자전거, 킥보드, 인라인 등을 타러 나온 아이들이 많았고 하천 산책로와 자전거길에 어르신들과 시민분들이 이른 봄을 즐기러 나오셨다. 아직은 쌀쌀한 추위는 점퍼로 막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분명 봄과 함께 있었다. 어느덧 3년여의 시간을 지내고 이곳에서의 마지막 봄이라고 생각하니 잊힐지도 모를 이 주변 모습들을 찍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점심때 오래간만의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앞에 놓고 한별이는 아이답게 좋아했다. 엄마가 만든 밥은 별로 특별해 보이지가 않은데 튀김의 고소한 냄새가 가득한 인스턴트 음식은 한별이의 마음을 얻은 모양이다. 영양과 절대가치를 떠나서 접하는 빈도와 기회가 적은 것은 대접을 받는다.
"한별이가 올해 5살이고 앞으로도 금방 초등학교 가고 커나갈 텐데 진짜 금방금방이야." "햄버거 먹으니까 중학교 때 L데리아를 갔었는데 떡볶이 골목도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학교 끝나고 버스 타고 나가서 먹었던 기억이 나네." 나는 그 당시 추억에 햄버거와 떡볶이가 있었는데 남편이 살았던 그 당시는 없었다고 한다.
"떡볶이를 좋아했던 내 친구 한때 왕따를 당했었는데.. 너도 마음에 안 들고 나도 마음에 안 들고 애들이 서로 얘기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름이 있고 그게 돌다 보면 걔가 뭘 잘못한 거 마냥 다들 싫어하고 괴롭혔어."
"그게 인성이 못돼 먹은 거지."
남편의 표정이 안 좋아지면서 말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인성 나쁘고 제대로 못 배워서 그런 거야? 초등학교 어린애들도 약해 보이고 제대로 방어 못할 것 같은 애들 괴롭혀. 요즘은 유치원 때부터 있다더라. 솔직히 당신도 괴롭힘 한 번 안 당해봤어?"
"아니."
"그렇잖아. 당신도 괴롭힘 당해봤잖아. 이건 너무나 흔해!"
내가 말했다.
"분위기 따라 괴롭힘도 해봤지. 그래서 하도 애들이 놀리니까 나중에 자살까지 한 동창생이 있어."
"이거 봐. 맞잖아. 당신 괴롭힘 당할 때 뭐 잘 못해서 당한 거야? 아니잖아. 그리고 당신이 분위기 따라 특정 한 명 같이 놀리고 괴롭히고 그럴 때 죄책감 느끼거나 이유 같은 거 있었어? 없었지?"
"몸에 비해 머리가 크다고 다들 놀려댔어."
남편이 말했다.
부모님이 주신 타고난 신체의 특성이 놀림의 대상이 되고 괴롭히는 이유라니 아무리 철없는 학생 때 얘기라고 하지만 나도 많이 듣고 보아 왔던 폭력의 고리가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지. 다들 재미로 했지."
남편이 인정을 한다.
"거봐. 나중에 그 동창 친구 자살했다는 거 들었을 때 어떤 마음앓이가 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 하나 책임감 느낀 사람 있어? 없잖아. 아무도 책임지지 않잖아."
햄버거 점심을 앞에 두고 5살 아이 앞에서 추억을 뒤적거리다가 이렇게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가 대화로 발전하고 말았다.
얼마 전 tv에서는 어른이들의 고민 상담소가 열렸다. 오은영 박사님이 나오셨는데 나는 거기서 쓸쓸이라는 출연자의 왕따 경험을 시선을 멈추고 주의를 집중해서 듣게 되었다. 출연자는 그때로부터 오랜 시간을 멀어져 왔고 그때와는 전혀 다른 외모와 멋진 모습으로 살고 있는데 아픔의 강도와 상처는 아직도 생생한 듯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어릴 때 받은 흔히 트라우마라는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 한 그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타인의 괴롭힘과 을의 삶
나도 또한 괴롭힘을 당했었다. 유치원은 다니지 않았으니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한 번 두 번 기억에 드문드문 남겨져 있는 그 일들은 괴롭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기억하지 않을 뿐이지 생생한 기억 상자 안에 보존이 아주 잘 되어 있다. 한 번은 6학년을 졸업한 친구들이 모여서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교문을 나서면서 불량한 아이들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가 한 여자 아이에게 괴롭힘을 시도하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아이의 손목을 낚아채 잡았다. 그 순간 나는 불량한 무리의 합동 표적이 되었고 길거리 연탄재를 머리에 마구 맞아야 했고 침 세례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당시 주위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고 혼자 받은 충격으로 집에 돌아와서도 부모님께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이 사건은 한 번의 불운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것 외에도 수십 번의 괴롭힘을 겪었고 옆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돌이켜 보면 나의 삶의 대부분은 약자였고 또 을의 입장이었다. 학교에서는 말이 없고 표현력이 없었으며 잦은 전학으로 친구 사귀는 재주조차 없었으니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 딱 좋았다. 사회에 나와서는 아무 스펙이 없는 대졸 여성이란 타이틀이 전부였고 학원 종사자로 일하면서 특별한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는 허술한 경력과 그저 그런 실력의 강사였다. 당연히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을이었고 고용안정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이 다니는 큰 직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직장 내 괴롭힘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왕따와 학교폭력이 가졌던 힘의 논리에 의한 강자의 괴롭힘과 모습이 매우 유사하지만 성인이 되고 사회 안에서 경제활동을 이어나가야 하는 어른이 된 입장에서는 그 압박감이 심리적으로 대단할 수밖에 없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악은 평범했다. 악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 타기 전 목표물인 어린 여자를 골라 뒤쫓아 타며 만원 버스 안에서 밀착할 순간을 기다렸다. 악은 초등학교의 여자화장실에 미리 와서 바지를 내리고 자위를 하면서 여자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악은 또 친구들과 함께 하교를 하는 꼬맹이 여자아이들에게 친절히 다가와 건물 옥상을 알려달라고 했다. 미성년 연약한 여자 아이들의 일상생활과 동선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보호자가 같이 없는 순간, 그리고 절대 약자와 독대할 수 있는 순간을 찾았다.
'평범한 악'이 성장환경 속에 가라지처럼 숨어 섞여 있었던 미성년 여자 아이는 자라 아이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존재를 보았다.
디지털 성범죄도 조주빈도 다르지 않았다. 악은 고도로 진화했지만 평범했다.
악의 평범성은 독일계 미국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 인격장애자들에 의해 행하여진 것이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한나 아렌트는 주장하였다.
또한 학교나 직장 등 단체생활을 하는 곳에서의 따돌림과 괴롭힘의 문제에도 악의 평범성을 발견할 수 있다. 조직의 분위기가 특정인을 괴롭히고 따돌리는 방향으로 형성되면 구성원들은 기계적으로 해당 분위기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나도 역사에도 기록된 악의 평범성을 학교에서도 보았고 성인이 되어 잘 모르는 분야에 처음 도전한 직장에서도 경험하였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엄마가 되어 점심을 먹다 나눈 남편과의 우연한 대화에서 다시 만났다.
악의 공통분모
나는 너 정도는 괴롭히고 때려도 될 것 같다.
악의 행동화 이전에는 공통적인 판단이 존재한다. 나는 그들 즉 범죄자 혹은 모든 악행자의 이성이 마비되었거나 멈추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이가 어린 미성년이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모든 악행은 상대를 물색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얼마를 생각했던 결론에는 내가 상대를 때리고 괴롭히거나 성범죄를 가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분명히 있다. 모든 악행은 나는 이 정도 해도 된다라는 판단을 분명히 거치는 것이다. 수 많은 유태인을 수송열차에 실어 대량학살의 가스실에 보낸 아이히만이 전쟁이 끝나고 참회를 하고 반성을 했는가? 하지 않았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아주 평범하게 일상을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법정에 서서 사형선고를 받았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히틀러와 나치를 비난하고 아이히만의 반성 없는 태도에 놀라워하기 이전에 유태인에 대한 미움과 박해를 이 정도 해도 되는 정의로운 판단쯤으로 여겼던 절대 다수의 대중의 생각에 놀라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히틀러와 나치 아이히만만이 절대악이 아니다. 그들에게 힘을 실어준 절대 다수의 대중의 판단과 도덕이 악의 편에 섰던 것에 부끄러워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히틀러에 모든 죄목을 씌우고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는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에게 나는 더욱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을의 성장
나는 오랜 세월을 견디고 버틴 약자였기에 약자와 을의 삶을 아주 잘 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익숙함을 무기로 불리한 압력과 폭력을 당하는 주변 을의 모습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고 용감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또 다른 을은 일방적으로 정서적 학대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얘기했다. 또 인간적 삶을 깡그리 무시한 근무표, 근무제도는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괴롭힘을 견디었던 어린 자아는 어른이 된 나에게 잘못된 갑질과 무리의 평범한 악을 반대하고 나서는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는 순간 옳지 못한 괴롭힘과 따돌림에 조금 더 맞설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을은 성장하여 또 다른 약자가 당하는 것을 알아보고 돕는 을이 되었다.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부당함을 당하고 있는 약자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말한 나의 목소리는 그렇게 크게 개선하는 움직임으로 나아가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약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불행에 주목하지 않는 능력이 있다.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맞서 싸우지 않아도 이기는 방법이 또 있었다. 그것은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상처와 슬픔에 너무 몰입하거나 아픈 나를 위로하겠다고 되감기 버튼을 계속 계속 눌러 감정의 소비를 끝도 없이 하면 역으로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상처의 치유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괴롭힘을 당했던 당시의 고통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나왔다를 무한 반복하지 않는 것은 어렵지만 중요하다. 점점 더 멀어져야 한다. 오늘은 한 발치 더 멀어지고 내일은 두 발치 더 멀어지면 되는 것이다.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 그 상처에서 멀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처음에 철철 흘렀던 슬픔의 피가 어느새 멈춰있고 뻥 뚫려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가 아물어 작은 상처만을 남길뿐이다. 회복탄력성이랑 말을 요즘 많이 듣는다. 특히 미디어와 매체에서 자주 듣는 그 말은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심리적 상처와 고통을 자주 경험하고 있다는 증거 같았다.
나도 삶에 크나큰 불행도 좌절도 아닌 그리고 나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타인의 악의로만 연결된 행위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마음이 차츰 생겨났다. 살면서 꽃길만이 아닌 가시밭길 투성이에 지뢰밭 같았던 아동 대상 성범죄자들, 언어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데이트 폭력, 직장 내 괴롭힘과 갑질, 성희롱의 고통은 깨달음으로 남았다. 그것은 인생을 살다 어쩔 수 없이 우연히 마주하거나 노출되는 폭력, 괴롭힘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방어기제였고 최후의 방어선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슬픔과 아픔의 마음상자가 살다가 가끔씩 나를 짓누르려 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그 상자를 당당히 열어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또 다른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데 사용하려고 한다. 살다가 또다시 나의 온 마음과 온 감정을 다 써서 슬픔에 흠뻑 빠지지 않고 회복탄력성을 남겨두는 것을 이곳에 꼭 적어두고 기억하려 한다.
어른이 된 을의 마지막 생각
그리고 나와 우리가 비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스며든 악행에 대해서 조금 더 철저하게 경계하고 생각하길 바란다. 괴롭힘과 왕따, 학교폭력 그리고 성폭력, 성범죄, 아동학대, 디지털 성범죄의 공통점이 한나 아렌트가 역사에 저술한 악의 평범성이 이제는 더 이상 아니길 나는 아주 간절히 소망한다. <악의 평범성>이란 다르게 말하면 사고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이성과 양심의 벽을 훌쩍 넘어버린 악이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우리를 악행의 가해자 또는 방조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악의 평범성의 루트를 끊어줄 정의는 바로 우리이고 나 자신이다. 비판받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폭력은 저절로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방어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미성년 우리의 소중한 아동과 청소년들이 악랄한 피해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평생의 고통으로 남을 수 있다. 아주 흔한 말이지만 모든 괴롭힘과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힘은 보통의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오늘도 생각한다.
자기 방어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한낱 어린이였던 을은 무분별한 성폭력과 괴롭힘 그리고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악의 평범성에 노출되어서 혼자만의 긴 외로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나는 그때의 어린 나로 다시 돌아가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어른들에게 간절한 부탁을 하고 싶다. 모든 어린이 청소년은 어떤 유형의 학대, 폭력, 괴롭힘, 성범죄로부터 안전한 환경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마음과 정서가 짓밟히지 않고 폭력적 환경의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보살펴 주십시오. 어린이들과 청소년에게 일상에 드리울 수 있는 모든 폭력과 괴롭힘, 성범죄 등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서 미리 알고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교육적 환경을 조성하여 주세요. 어린이와 청소년이 모든 폭력과 괴롭힘,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가르쳐주세요.
청소년에게 올바른 길도 당연히 가르치고 알려줘야 합니다. 그리고 각종 지능화된 범죄와 악의 근원과 고리 또한 정확하게 알려주고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시험, 성적, 수능, 경쟁, 스펙, sky와 같은 경쟁가치에만 내몰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삶을 살아갈 때 인간, 존엄, 존중, 인권, 평화 등의 가치를 노래하는 환경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