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으로살고 싶다.
담백하게 쓰고 싶다.
기름기 쫙 빼고 쓸데없는 데코레이션들은 걷어내고 지나치게 아름다운 수식도 없이 그냥 술술 읽히는 담백한 글을 쓰고 싶다. 너무 난해해서 돌아가 다시 읽어야 이해되는 문장이 아닌, 담백하지만 마음을 간지럽히는 문장에 되돌아가 다시 읽고 싶어 지는 글이고 싶다. 넘치는 감성도 없이 그럴듯해 보이는 단어들의 나열이 아닌, 일상 언어로 마음을 잔잔히 일렁이게 하고 싶다.
유명하다는 혹자의 글을 읽다가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때가 있다. 오히려 별것 아닌 것 같은 문장에 마음을 내어주는 때가 있다. 에세이를 읽을 때에도 진솔함이 담뿍 묻은 글이 있는가 하면 화려하기만 한 텅 빈 글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속내가 무엇인지 민낯은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 글을 보면 마음은 조금도 일렁이지 않는다. 글의 내면을 마주 보고 글의 민낯, 글의 진짜 눈빛을 마주하고 싶다. 어떤 글은 가면을 쓰고, 어떤 글은 눈을 피하고, 또 어떤 글은 화려한 포장지 뒤에 감춰진다. 그렇게 풀메이크업을 한 채로 나를 만나러 오면, 그런 글과 나는. 우리는 마주 볼 수 없기에 그러하기에 마음에 닿지도 마음에 남지도 않는다.
읽는 자로서의 세월이 쌓이다 보니 때로는 어디서 읽은 듯한 글귀나 표현과 맥락이 그대로 담긴 글, 어딘가에서 본듯한 문장의 나열들, 어설프게 맛을 흉내 낸 글들과 문장만 화려한 말장난 같은 글을 만나는 때가 많다. 그저 그런 화려하기만 한 글에는 결단코 쉽게 매료되지 않는다. 작가의 냄새, 작가의 체취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 글이 좋다.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이 글이 작가이고 작가가 글인 것 같은 그런 글이 좋다.
요시모토 바나나 이후로 한동안 편애하는 작가가 없었는데 몇 해 전 편애하고 싶어 지는 글을 만났다.
'박준 작가'의 시집과 산문집을 연달아 읽고 난 후이다. 그의 글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마음을 빼앗겼다고 표현해야 할 것도 같고 마음에 훅 하고 밀고 들어왔다고 표현될 것도 같다. 그의 산문집을, 그 책을 몇 날 며칠을 읽었는지 모른다. 사실 몇 날 며칠을 붙들고 읽어야 할 만큼의 방대한 페이지의 책이 아니나 나는 그 책을 오래도록 붙들어두고 읽고 싶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아껴 먹었다. 꼭꼭 씹어서 먹었다. 그렇게 한 권을 다 읽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러면 또 다른 문장이 좋았다. 또 다른 글이 내 마음을 움켜쥔다. 그리곤 놓아주지를 않는다. 그렇게 마음에 들인 문장이 너무 많아서 책의 한 귀퉁이를 접다가 포기하고만 책. 마음에 와 닿은 문장을 오래오래 가지고 있고 싶어서 책을 읽다 말고 책장을 덮곤 했다. 마음에 담은 글의 여운을 조금 오래 음미하고 싶어서 그랬다.
아. 이런 글을 자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문. 득.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해 버렸다.
고등학교 시절 한참을 책과 문학 그리고 글에 매료되어 푹 빠져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공부해야 하고 어쩌고 하는 건 내 안중에 없었다. 오로지 재미있는 책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읽어가는 것, 그리고 어떤 문장이든 써보는 것에 온통 마음이 묶여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알았다. 내게 '쓰는 재능'이 없다는 걸 말이다. 그 시절 한창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글을 쓰는 것보다 노래를 훨씬 잘했다. 오히려 노래에는 작게나마 재능이 있었지만 글에는 거기에는 내 달란트가 한 톨도 없는 듯했다. 그 시절 가장 친한 친구가 쓴 시를 본 이후로 나와 같이 문예창작반을 들으며 글을 쓰던 그 친구의 글에 대한, 쓰기에 대한, 표현에 대한 재능을 본 이후로 '나는 딱 일기나 쓸 수준이구나' 하고 '쓰기'에 대한 마음을 고이 접어 날렸다. 그 후로 나는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로지 '읽는 사람'으로만 남았다.
그런 내가 쓰고 싶어 졌다. 쓰기에 진심이고 싶어 졌다. '쓰는 사람'이고 싶어 졌다.
여전히 쓰기에 재능이 없다. 20년 전 없었던 재능이 20년 후 어느 날엔가 불현듯 발현되는 기적은 원하긴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작가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오랫동안 읽고 쓰고 느끼는 것에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꾸준함으로 평생 쓰기를 사랑하며 내 옆자리에 두고 싶다.
이야기 속에 사는 모든 생명들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글,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저 밑바닥 티끌 하나까지 끄집어내는 글, 사람을 공감하게 하거나 사유하게 만드는 글, 춘삼월 꽃이 피듯 사람의 마음을 꽃피우는 글. 그리고 그런 글을 쓰는 사람.
쓰는 사람이고 싶다. 담백하게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