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생활로
두 번의 여행기를 작성하는 동안 벌써 두 번의 개강이 지나갔다. 한 번은 유럽에서의 개강이었고 한 번은 한국에서였다.
그때, 영국으로 향하기 직전 우리의 마지막 행선지는 포르투갈이었다. 다사다난했던 한 달 남짓의 유럽 여행을 뒤로하고 리즈로 향하는 비행기의 탑승을 앞두었을 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기억에 남는 것은 '정착'에 대한 갈망이다.
방랑 생활이 꽤 즐겁긴 했지만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그것도 오래 할 것은 못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끝없이 짐을 싸고 어딘가로 향하는 것은 정말이지 힘이 빠지는 일이었다. 비록 마지막 여행지였던 포르투갈이 너무 취향이라 여기라며 계속 있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도착한 리즈 공항은 내 생각보다 작고 허름했다. 그럼에도 학교에서 보내준 택시를 타고 가는 그 길은 호사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늦은 밤 도착한 기숙사에서 포르투갈의 마지막 흔적을 먹어버린 뒤 영국에서 벌어질 반년을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
몇 주간의 고민 끝에 골랐던 나의 기숙사는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그리고 영국의 날씨는 내 예상을 웃돌게 음울했다.
이쯤에서 이 글이 어떤 글인지 궁금증이 생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도 같다. 그냥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같은 글 정도로 봐주면 좋을 것 같다. 물론 난 소설가도, 구보씨도 아니지만.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니겠는가.
도착 직후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리즈 전역에 가장 많은 카페, 카페 네로였다. 하나에 3파운드인 요거트를 먹으며 앞으로 리즈에서의 하루를 어떻게 채워가야 하는지에 대해 짧게 생각했다.
수없이 많은 개학과 개강에도 잊을 수 없는 개강일이 있다면 눈 오는 리즈 대학교에서의 개강일이다.
영국에 살다 보면 배우게 되는 삶의 지혜 하나는 바로 태양의 소중함이다.
분명 맑은 날이 많다고 해서 선택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즈에서 맑은 날을 보기란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해가 뜬 날이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맑은 날을 만끽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날씨가 정말 좋았던 어느 날, 나는 학교 친구 하나를 꾀어내어서 그 친구가 소개하는 리즈 근교의 한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날은 내 인생 첫 (무단) 결석일이자 리즈에서 가장 햇살이 좋았던 날들 중 하나였다.
교환 생활의 즐거움이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여행과 생활에 한 발짝식 걸쳐둔 채로 하루는 여행으로, 하루는 생활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교환생활의 형태는 그 의미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만약 내가 파티를 즐기는 사교적인 인간이었다면 아마 나는 영국의 햇살을 즐기러 밖으로 뛰쳐나가기보다는 플랫 메이트들과의 포틀럭 파티, 그리고 클럽을 즐겼을 것이다.
한참 유럽의 밤을 두려워하던 시기를 지나 3월 무렵에는 11시에 혼자 리즈 시내를 걸어 다니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늦은 시간에 리즈 시내로 향했던 이유는 학교에서 주최하는 프랑켄슈타인 연극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애석하게도 뮤지컬의 나라 영국의 창작극은 그다지.
베이킹은 영국에서 새로 생긴 취미였다. 영국에서 수많은 빵을 사서 먹었지만 그 어떤 빵도 덴마크 친구 메리가 알려준 레시피로 만든 빵만큼 맛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한 베이킹은 한국에서의 삶에 적합한 취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여유로웠던 영국에서의 나에게는 아주 적합한 취미였다. 낡은 오븐에서 구워져 나오는 빵이 성공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며 가슴 졸이던 지난 날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