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돈 오백 원을 쓰기 위해, 오백 원을 놓친 어리석은 날
‘띠리리링, 띠리리링 ♡사랑하는 통통이♡’
커피를 마신 컵에 무얼 더 부어 마실지, 찬밥을 데워 먹을지 고민할 때면 어김없이 둘째의 전화가 걸려온다. 최근 통화목록의 80%를 차지하는 아홉 살 남성. 나와 먹는 이야기를 세상 긴밀하게 나누는 둘째 통통이다.
“엄마, 배드민턴 선생님한테 쿠폰 받았어.”
오늘은 유난히 흥분된 목소리다. 방과 후 배드민턴 선생님에게 ‘옛날 도넛 500원’이라 적힌 쿠폰을 받았다고 했다. 태권도에서 ‘슬러시 500원’ 쿠폰을 받아 써먹어 본 적은 있는데, 도넛 쿠폰은 처음이라며 전화기 너머로 조잘거렸다.
“통통아! 옛날 도넛, 엄마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통통이가 신나게 뒷말을 덧붙였다. 학교 담벼락 넘어 보이는 미용실 옆 포장마차에서 도넛과 떡볶이를 파는 걸 본 적 있는데 아마 그곳이 옛날 도넛인 것 같다고. 거기는 500원으로 사 먹을 만한 게 없어 돈이 더 필요할 것 같으니, 그 부분은 엄마가 해결해 줬으면 줬겠다고. 일단 가게 이름을 확인하는 게 먼저니 학원 마치고 가는 길에 포장마차의 간판을 확인하겠다고. 이러한 이유들로 늦을 수도 있다는 통보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집에서 무얼 먹을지가 늘 궁금한 둘째의 야심 찬 계획을 알아차렸다. 혼자 점심을 먹으려던 계획을 변경했다. 먹던 컵에 시리얼과 우유를 부어 허겁지겁 삼키고 세수를 했다. 의도치 않은 만남을 대비해 선크림을 바르고 가르마를 정돈했다. 학원 끝날 시간에 맞춰 교문 앞 횡단보도에서 둘째를 기다렸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사랑하는 통통이♡’
“통통아, 엄마 교문 앞 횡단보도 앞이거든, 이쪽으로 올래?”
“어, 엄마 왜 왔어?”
“너 쿠폰 쓰고 싶다며? 같이 옛날 도넛 같이 가보려고.”
“앗싸, 알았어. 금방 갈게, 3분이면 가.”
깜짝 마중을 나와 그런건지, 쿠폰을 쓸 수 있어 그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한껏 들뜬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덩달아 들떴다. 500원으로 살 수 없는 무엇이 우릴 전염시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둘째의 안내에 따라 포장마차를 찾아갔다. 포장마차 귀퉁이 간판에는 다행히 휴먼옛체와 닮은 빨강 글자로 ‘옛날 도넛 떡볶이’가 쓰여 있었다. 포장마차 진열대 위에는 하얀 설탕을 뒤집어쓴 꽈배기 도넛이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둘째와 나의 시선은 그 옆에서 빨갛고 반지르르한 양념을 두른 채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떡볶이에 꽂혔다.
“엄마, 떡볶이는 오백 원이 넘겠지?”
“선생님한테 칭찬받아서 쿠폰도 받았는데 엄마가 사줄게.”
“칭찬받아서 준거 아니고, 골고루 다 나눠주던데?”
“오늘은 배드민턴을 모두 다 특별히 열심히 쳤나 보지.”
“그런가? 맞아. 오늘 다 열심히 쳤어.”
근대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을 법한 티브이를 보고 있던 노부부가 우리에게 뭘 먹을 건지 말하란 신호를 보냈다. 들뜸이 가라앉지 않아서인지 오랜만의 포장마차라 그런지 한참을 머뭇거렸다.
“너, 떡볶이 먹을 거지? 여기 떡볶이, 아. 컵에 담아 주시는구나. 큰 컵 하나랑요.”
“슬러시랑 같이 먹는 컵이 있고, 그냥 일반 컵 있는데 어떤 거?”
할머니가 두 종류의 컵을 보여주자 둘째의 눈은 휘둥그레 커졌다.
“엄마 나 슬러시 컵볶이 먹을래.”
“슬러시는 어떤 맛으로 줄까? 콜라랑 파인애플 있는데”
“저 파인애플요.”
할머니는 길쭉한 컵을 뽑아 노란 슬러시를 3분의 2 정도 담고는 뚜껑처럼 생긴 플라스틱 컵을 그 위에 포갰다. 양념이 걸쭉하게 끌고 있는 곳에 떡을 몰아놓고 요리조리 굴리다 주황색 에나멜 국자 한 가득 떡볶이를 퍼 컵에 담았다. 구멍 사이로 분홍 빨대를 꽂고, 냅킨 한 장에 대나무 꼬지를 싸 건넨다. 둘째의 탄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큰 컵볶이 하나 더 주세요.”를 반사적으로 외쳤다. 둘째가 슬러시를 두 번 빨아먹고 꼬지로 떡을 짚어 후후 부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입을 뗐다.
“우리 집 단골 녀석도 요만할 때 혼자 와서 떡볶이를 사 먹었는데, 글쎄 걔가 벌써 대학생이라. 요새 공무원 준비한다고 와서 한 번씩 또 사 먹고 가.”
떡볶이를 뒤적거리던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꼭 요만할 때 자기 용돈으로 떡볶이를 사 먹었는데, 하루는 떡볶이를 받자마자 그만 홀랑 길바닥에 쏟아버렸어. 난 기억도 안 나는데, 내가 그걸 보고 다시 새 컵에 떡볶이를 담아줬다고 하더라고. 걔가 다 커서 와서는 그 말을 하는 거야. 여기서 또 똑같이 떡볶이를 먹으면서.”
할머니가 말하는 동안 꼬치가 꽂힌 컵볶이는 냅킨 한 장과 함께 내 손에 들어와 있었다. 종이컵이 품고 있는 온기만큼 따뜻한 마음도 함께 건네받았다. 만 원한 장과 500원 쿠폰을 건네고 거스름돈을 받아 뒤돌아섰다. ‘호호’ 거리며 먹던 둘째의 컵은 벌써 바닥이 보였다.
“통통아, 다 먹으면 이거 더 먹어, 왠지 부족할 것 같더니 하나 더 사길 잘했네.”
“엄마 근데 이거 두 개 해서 얼마였어?”
노부부의 이야기를 듣느라, 슬러시 컵볶이 가격이 얼마였는지, 일반 컵볶이 가격은 또 얼마인지 물어보지 못했다. 건네받은 거스름돈은 7,800원. 슬러시 컵볶이와 일반 컵볶이 두 개의 가격이 2,700원이라 추측할 뿐이다. 마침 돌아온 첫째에게 둘째가 옛날 도넛에서 컵볶이를 사 먹었단 얘기를 늘어놓았다.
첫째가 말했다. 두 개를 합하면 원래 2,200원인데, 할머니가 500원 쿠폰을 빠뜨리고 계산한 것 같다고. 주문하기 전 가격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거스름돈을 세는 오랜 철칙이 무너진 날. 공 돈 오백 원을 놓치고도 기분이 좋았던 날. 점심을 부실하게 먹고도 배가 불렀던 날. 둘째가 받은 쿠폰 하나가 평소답지 않은 이상한 날로 우리를 초대했다.
얼마인지 따지지 않고 주고받는 무언가에 의지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고. 절망의 순간에 필요한 건 잘잘못을 따지는 피로가 아닌 뜻밖의 친절이라고. ‘돈’이 전부라 말하는 세상에서는 절대로, ‘돈’만으로 살 수 없다고.
어렵고도 낯선 명제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먹다 만 컵볶이 양념이 혀끝에 아른거린다. 오늘도 통통이 마중을 가야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