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하루 중 내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 온몸에 힘을 뺀 채로 터덜터덜 걸을 때마다 군더더기 없는 나를 만난다. 담백하고 낯선, 오래도록 잊고 있던 반가운 나를. 이 시간을 위해 고도의 전략 세워 서너 시간을 움직인다. 이를테면 저녁 준비와 함께 밀린 설거지를 하며, 냉장고 속 재료를 확인해 다음 날 아침 메뉴를 정하고, 아이들 숙제와 준비물 그리고 빨래 바구니 안 쌓여있는 옷가지 양을 체크하고, 거실과 방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며 잔소리를 섞는다. (이런 글로 쓰는 데도 숨이 차다)
사랑하지만 때론 버거운 존재 ‘가족’.
그들과 이번 생을 함께하고 있는 건 크나큰 축복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폭죽이 터지면 매캐한 연기가 뒤덮듯 축복을 누리는 만큼 감내해야 할 무엇이 있었다. 아내와 주부로 사는 15년 동안 엄마라는 이유로 반복된 일을 강요받을 때마다 수시로 발끈했다.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일이 존중받지 못할 때는 한없이 서늘해졌다.
시어머니의 밥은 챙겨 먹냐는 안부 인사를 곧이곧대로 넘기지 못했다. (돈을 안 벌고) 살림만 하는 여자인 난, 필사적으로 주방을 지켜야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집밥이 최고라는 은밀한 강요와 주방을 떠났냐는 은근한 추궁이 진절머리 났다. 난 고작 이딴 일에 화를 내는, (이럴 거면 결혼은 왜 했냐는) 자기 비난을 일삼았다.
불행한 건 아닌데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롭지는 않지만, 떡볶이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나를 따라다녔다. 흘러가는 시간만큼 속이 여물지 않는 내가 그렇게 못나 보일 수 없었다.
20여 년간 이어진 질문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도 나를 따라다녔다. ‘무엇을 위해, 무얼 하며 살아야 할까?’식의 고민은 여전했다. 이도저도 아닌 내가 누군지 늘 애매했고,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몰라 할 수 있는 일에 매달리며 방황했다.
답답함이 나를 몰아세웠다. 방황마저 쓸모 있어야 한다는 압박과 불안한 마음이 수시로 나를 주저앉혔다.
마음의 실밥이 뜯긴 채 꾸역꾸역 살았다. 이러다 미쳐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걸었다. 울렁이고 벅찬 감정이 들끓었다. 내뱉고 토해내고 싶었다. 내 마음을, 생각을, 감정을. 그래서 무작정 썼다. 블로그에, 메모장에, 나에게 보내는 카톡에.
흐릿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의 나를 만났다. 걷다가 뜬금없이 흐뭇해하고, 사연 많은 여자처럼 눈물을 흘렸다. 미쳐버릴 것 같아 걸었는데, 혼자 걷는 걸 미친 듯 좋아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하루에 몇 시간 삶아 빤 행주로 식탁을 닦는 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내 입에 딱 맞는 커피집을 찾아내고, 마음이 편해지는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코끝을 찡하게 울리는 책을 찾아 읽었다. 그 한 줌의 시간이 켜켜이 쌓이자, 사라져 가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할수록, 혼자인 내가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애틋하게 대하자, 삶을 설명하는 몇 안 되는 공식을 받아들일 여유도 생겼다. 용감하고 소심하게, 명랑하고 우울하게, 씩씩하지만 여전히 어설프게 날 알아갔다.
문득 ‘잘살고 있구나.’란 느낌이 들었다.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었다.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더없이 소중했기에, 오늘도 내일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밀도 있는 삶을 산다는 확신이 들자, 사랑하지만 미워했던 사람들의 시선과 요구도 서서히 달가워졌다. 밝고, 명랑한 척 애쓰지 않아도 살아갈 힘이 생겼다.
요즘은 새벽 산책에 푹 빠졌다. 혼자 걷는 밤길도 나쁘지 않지만, 어슴푸레 밝아오는 보랏빛 하늘 위를 장식하는 구름을 보는 일도 즐겁다. 날마다 다른 하늘의 빛깔과 구름의 모양, 그리고 해가 뜨는 시간을 지켜보며 난 매 순간 ‘잘’ 살아있음을 느낀다.
주부, 엄마, 아내란 이름에 가려진 나를 돌보는 은밀한 시간. 우아하게 살짝 미쳐있는 상태. 이토록 좋은 걸 여태 모르고 산 나에게 진중한 사과를 건네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다 이 책을 펼친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오롯이 혼자일 때 밀려드는 감정과 친해졌으면 한다. 혼자만의 시간에 세련된 사치를 부려가며, 쓸쓸하지만 명랑한 여정에 볼품없는 내 글이 작은 응원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