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혼자 울기

울기 좋은 밤공기를 당신도 알았으면

by 아는이모


걷다 울어 본 적이 있는가.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은 대부분 yes 라 대답할 것이라 생각하며 글을 잇겠다 )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슬픈 음악이 귓가를 채우지 않았는데도. 속절없이 눈물이 흐르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딱 부러지고 당찬 유년시절을 보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씩씩해졌다. 그래서인지 결혼 후 새롭게 부여된 과업에도 크게 낯설거나 힘들지 않았다. 둘째를 낳고 나서는 젖몸살이란 걸 모르고 지나가는 행운과 한층 수월한 수유생활로 조금의 여유마저 생겼다. 십 킬로그램의 아기를 등에 메고 청소기를 밀고 이유식을 만들었다. 칭얼대는 둘째를 안고 잠들기 전 첫째에게 꼬박꼬박 그림책도 읽어줬다. 틈틈이 중고카페에 알림을 해두고 만 원, 이만 원을 아끼고 벌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말만 육아 생활에 등장하는 남편(당시 주말부부였다.)의 상황도 너그럽게 이해했다. 휴가를 기다리는 이등병의 마음으로 주말을 기다렸다. 씩씩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다.


생산성을 증명해 보이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커져만 갔고, 살림만 하는 여자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발버둥 치는 걸 숨기고 또 숨겼다. 알아서 척척 병은 꽤 오랜 시간 나를 갉아먹었다. 핑계 대고, 투정 부리고 싶은 걸 꾹꾹 눌러 담으며 무던한 척 꼿꼿하게 5년의 시간을 보냈다.

둘째의 잠투정이 유난히 길던 밤. 고이 잠든 첫째를 깨우지 않으려고 침대와 화장실 사이를 수없이 오갔다.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좁은 공간을 까치발로 서성거렸다. 욱신거리는 손목과 끊어질 듯한 허리 통증을 참고 있는데, 옆 방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남편의 큭큭 대는 웃음소리가 안방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겨우 쪼아놓은 나사 하나가 허무하게 튕겨져 나갔다.


"그만 좀 자라고. 쫌!"


눈을 부릅뜨고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괴성을 질렀다. 남편의 무릎 위에 아이를 던지듯 내려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헐떡거리는 남편의 크록스를 신고 아파트 정문을 벗어났다.


E


낯선 하늘을 메우는 달빛이 공원 산책로를 비췄다. 누구도 날 찾지 않는 순간이 지속되자 몇 분 전 괴물 같은 내 모습도 잊혀갔다. 선선한 봄바람에 취해 땅에 비친 그림자를 한없이 쳐다보며 걸었다. 문득 보풀이 한가득 올라온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부끄러웠다.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나만 신경 안 쓰면 그만이라 외면하며 고개를 들었다. 앞서가는 남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에 손을 둘렀다 깍지를 꼈다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흔한 연인들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갑자기 울컥하고 눈물이 터졌다. 괄호 밖으로 빼두고 살았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때 그 시절의 우리가 그리워서. 이따위로 변해버린 내 모습이 거지 같아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이런 생각하는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모성애로 엄마가 됐나 싶어서.


전화벨이 울려 댔다. 받을까 말까를 몇 번 고민했다. 눈치 없이 내 소재 따위를 파악하는 남편이 아닐 거란 믿음에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달이 났다. 남편의 목소리 너머로 자지러지게 넘어가는 둘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좀 이상한 것 같다고, 단순한 잠투정이 아닌 것 같다며 빨리 와 보라 말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뒤돌아서 달렸다. 걱정과 두려움, 미안함이 섞인 마음이 흐르던 눈물을 쏙 빨아들였다.


집에 가보니 엄마 자격을 논하며 추억놀이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이는 두 손으로 두툼한 귓불과 목덜미를 쥐어뜯고 있었다. 두 귀가 벌겋게 부은 둘째를 껴안고 응급실로 가는 차 안에서 빌고 또 빌었다. 엄마가 미안하다고,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계란 흰자 알레르기’


첫째에게는 없던 알레르기가 둘째에게는 있었다. 기도가 붓기 시작해서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위험할 뻔했다는 의사의 말에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렸다. 허벅지 주사를 맞고 고이 잠든 둘째와 잠이 덜 깨 몽롱한 표정의 첫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넋이 나가 있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많이 놀랐지? 그래도 다행이다.”


그의 손이 떨리던 내 어깨를 묵직하게 감쌌다. 괄호 밖 감정과는 또 다른 무엇이 나를 찡하게 울렸다. 그때 그의 손에서 느꼈던 온기를 아직도 난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문득 밤 산책을 할 때면 그 일이 생각난다. 계란을 못 먹던 아이는 아침마다 불평 없이 계란 프라이를 먹고 등교하고, 누구보다 나의 외출을 반기는 첫째의 정수리에서는 이제 제법 남자 냄새가 난다. 혼자 걷는 일이 더 이상 홀가분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감흥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밤 산책을 나올 때면, 아파트 모서리에 잘리지 않은 하늘을 찾아 휴대폰을 갖다 댄다. 그리고 사진을 ‘찰칵’ 찍는다. 비슷한 각도에서 찍어도 오묘하게 다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하늘을 발견하면 이게 뭐라고 뿌듯하다.


때론 감격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을 만나면 들고 있던 휴대폰을 다시 내려둔다. 렌즈 따위로 풍경을 방해하는 대신, 그저 순간에 오롯이 머무는 걸 택한다. 좁다란 길의 향기를 채우는 이름 모를 들꽃을 감상하며 구석구석 나의 마음을 살핀다.

오늘은 이 길로, 내일은 저 길로 정해진 시간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걸러지는 무언가가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딛으며, 나를 향했던 후회와 자책이 옅어진다. 잊어버릴 것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을 구분하며 혼란한 마음에 질서를 부여한다. 그리고 감사해야 할 것과 사과해야 할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지나가는 이들은 모른다. 내가 밤공기를 마시며 얼마나 글썽였는지를. 울기 좋은 밤공기를 당신도 알았으면 한다. 뜨거운 눈물 몇 줄기가 주는 위로를 나처럼 받았으면 한다.


내뿜고 비우는 그런 순간이 주는 묘미를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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