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사무실 2층

무심한 공간이 베푼 친절

by 아는이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팀 타월 한 장을 가슴에 올린다. 돌덩이 같은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고통이 열기에 사그라든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조용한 숨을 내뱉는다.


‘모유를 왜 이렇게 못 먹지? 엉덩이 땀띠는 기저귀 때문인가? 이렇게 울어도 괜찮은 건가, 두피 진물을 왜 나는 거지? 샴푸를 바꿔야 하나.’

십여 년 전, 육아를 글로 배우며 백일의 기적을 기다렸다. 순진하게도 그땐 하루가 백일처럼 흐를지 몰랐다. 삼 개월만 지나면 제시간에 밥을 먹고 잘 수 있고, 삼 년만 지나면 잃어버린 시간과 나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삼 년 삼 개월이 지나도 바뀌는 건 없었다. 먹이고 입혀야 할 존재가 자궁 밖 세상으로 나왔다는 건, 부모라는 책임 아래 한 생명의 안위를 위해 해결해야 할 숙제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것이었다. 밀려드는 숙제를 허겁지겁했다. 어영부영 엄마 노릇을 흉내 내는 사이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조그만 아들의 뒷모습을 볼 때면 문득 ‘일주일만 늦게 낳을 걸.’이란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다. 양수가 터져 위험했던 순간을 까맣게 잊은 채. 12월 생 아들을 둔 나의 터무니없는 한탄은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낮의 길이가 가장 짧다는 동짓날 태어난 아들은 자신의 등짝보다 큰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했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계단을 오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유모차에서 칭얼대는 둘째를 들여다봤다. 네 시간 후 손도 발도 키도 입도 작은 아이가 자신보다 한 뼘 큰 친구들 사이에 휩쓸려 교문 밖으로 나왔다.


다음 날, 또 그다음 날도 유모차를 밀고 괜히 교문 앞을 기웃거렸다. 열대 우림 정글 속, 고이 기른 강아지를 풀어 둔 마냥 마음을 졸이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불안을 잠재우려 조급한 마음에 사람을 구걸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억지로 맺은 인연은 쉽게 탈이 났고, 오해를 불러왔다.

불편한 관계가 남긴 상처의 끝은 나로 향했다. 누군가의 시선과 말이 피곤하다 못해 두려웠고, 해야 할 일이 기다리는 집은 숨이 막혔다. 물티슈와 감기약이 뒹구는 너저분한 식탁이 몸서리치게 보기 싫었다. 단 1%의 설렘도 일상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나에 대한 절망이 가득했다. 간절하고 절실하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당시 나의 최선은 철저한 고립을 택하는 것이었다.

숨을 곳이 필요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공간. 관리 사무소 2층 아파트 도서관이 꼭 그랬다. 체리색 책장과 깔 맞춤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는 곳. 낡은 히터의 거친 소리와 매캐한 석유 냄새가 이상하게도 반가운 곳.


올 사람만 와도 상관없다는 무심한 친절을 베푸는 그곳에서 제목도 지은이도 모르는 책을 골라 앉았다.


맥없는 표정과 처량한 눈빛을 감추려 책 속에 얼굴을 묻었다. 같은 문단을 서너 번 읽으며, 책과 영혼이 따로 노는 느낌도 괜찮았다. 오래된 자명종 시계와 어울리는 큼지막한 달력이 걸린 벽을 바라보며, 매일 같이 한두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편안한 그곳에서, 출입문을 등진 채로.

어느새 방패처럼 펼쳐 든 책에 애정이 깃들었다. 외출할 때면 한 손에는 장바구니,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나섰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기다릴 때면, 주변 소음과 시선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화단과 학교 벤치에 앉아 틈틈이 책을 펼쳤다. ‘도대체 이런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지?’ 감탄과 질투를 번갈아 보내며, 작가가 펼쳐놓은 세상을 둥둥 떠다니며 울고 웃었다.

숨고 싶어 펼쳐 든 ‘책’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의미 없는 자리에 끼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않고, 시시콜콜한 대화에 섞이지 못해도 외롭지 않은 사람.



혼자 더 잘 노는 ‘자발적 아웃 사이더’


둘째가 일곱 살이 될 무렵 이사를 했다. 은연중에 아파트 도서관 위치를 확인했다. 비상구 위치를 미리 알아두는 느낌이랄까. 오래된 자명종을 볼 때마다 가끔 그곳이 생각난다. 그때의 내가, 그랬던 내가 그리고 지금의 나를 생각하며 다짐한다.


새로운 관계가 두려워 지레 겁먹고 도망가지 말자고. 사람을 섣불리 단정 짓는 마음에서 멀어지자고. 부드럽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보자고.


왠지 요즘 나라면,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책으로 버틴 세월로 한 생명을 키운 나니까.”



P.S. 동짓날 태어난 그 아이는 지금은 반에서 키가 제일 크답니다. 12월생을 둔 어머님들♡ 걱정하지 마셔요.


keyword
이전 03화걷고 또 혼자 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