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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승 Jun 05. 2023

썸 탈래? 냉면 먹을래?  

서울 송파 유천냉면에서

늦은 저녁, 캐주얼 차림의 남녀가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서 캔맥주를 홀짝이고 있다. 어쩌다 보니 같은 대학을 나와 같은 직장까지  다니는 선후배 사이. 썸은 여자 혼자 타고 싶어 하는 눈치다.      


위이 이이이 잉~ 모기가 파드득 거리며 맥주를 든 희진이의 팔뚝에 와 앉는다. 시큰둥한 표정의 그녀, 귀찮음이 한껏 묻어난다. 인상을 구기며 안주를 집으려던 손을 펴, 바닥으로 철썩! 모기를 친다. 찍! 하고 모기 시체와 피가 동시에 팔뚝에 화석처럼 붙는다.      


“이 새끼가 감히 내 피를 빨아먹어?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곱게 안보내서 다행이네”      


입술을 이 죽이던 희진은 순간 표정이 급변한 상철을 본다. 모기가 불쌍하다는 표정,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냐 하는 생각이 찌푸린 얼굴에 물씬 드러난다. 이 말을 해줘야겠다는 듯 입술을 씰룩거리며 상철이 말했다.


“으... 잔인해. 넌 어떻게 된 애가 인정머리가 그렇게 없냐?”

“왜 모기에게 인정이 필요해? 지금 선배 피 안 빨렸다고 그러는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철은 하늘색 셔츠를 걷어 빠알갛게 부어오른 살갗 보여준다. 분명 모기에게 물린 자국이다. 그것도 두 방이나. 같은 자리를 물었다. 피부가 깨끗하고 하얘 물린 자국이 더욱 선명하다. '얼굴만 하얀줄 알았더니 속살은 더 하얗네. 백설 왕자야 뭐야?!'  희진은 상철의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팔뚝에 집중된 시선을 애써 피부색으로 돌린다. 상철은 희진이 아무말이 없자, 직접 물린 자국에 대해 말했다.


“이것 봐. 난 두방이나 물렸다고. 그래도 쫓아보내지 죽이지는 않는다. 모기도 엄연히 한 생명인데..”


갑자기 잔인 무도한 인격체로 몰렸다는 생각에 희진은 기분이 상했다. 욱 하고 성질머리가 올라왔지만 말빨로 이겨줘야지 하며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숏컷 머리에 짙은 눈썹, 거기에 쭉 찢어진 눈매 까지 위로 올라가니, 결심만으로 성난 얼굴을 감추긴 어려워 보였다.


“아니 내가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모기가 피를 빨려고 대롱을 피부에 꽂으면 고정돼서 날아갈 수가 없어. 그래서 내 손에 잡힌 거야. 과학적 상식이 있다면 인정이 읎네 있네 하진 않을 텐데”      


뭔가 말을 하면서도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평소 자존심이 강한 상철이 상식이 없다고 한 말에 발끈할게 뻔했으므로 앞의 말은 그냥 넘어가겠지 하고 희진은 예상했다. 역시는 역시였다.           


 "뭐 상식이 없어? 내가 어릴 때 책 뭐지 그 세상에서 젤 두꺼운 책. 왜 까맣고 막 위키피디아 같이 이것저것 설명 적은 책 있잖아.. 아 우리 집에 아직도 있는데.. 암튼 그거 줄줄 외워서 별명이 한상식이 였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희진의 기억 속에도 한상철은 대학 때 하도 아는 게 많아 걸어 다니는 네이버 지식인으로 불렸었다. 과제도 이것저것 잘 가르쳐주고 참 좋은 선배였는데... 살구빛 벚꽃이 흩날리던 신입생 때, 뭣도 모르던 그 시절 졸졸 상철을 따라다니며 학교생활에 적응했던 게 떠올랐다. 귀찮다며 뭐든 물어봐도 손사래 치면서 막상 그 누구보다 친절했던 그였다. 같은 과에 같은 동아리, 참 동아리 축제 준비도 같이 했었지.. 그때 늦은 밤 뒤풀이에서... 갑자기 희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 생각났다. 브리테니스!”     


상철이 다소 큰 소리로 말하는 통에 희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무안했는지 애먼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 갑자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

“뭐 화라도 난 거야?”

“...”     


희진은 한심하다는 듯이 상철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말한다.      


“보면 몰라? 술 마시니까 빨갛지”      


이러려고 맥주를 마셔뒀지, 희진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슬쩍 지어진다. 와자작~ 과자를 소리 내서 깨물며 상철에게 들킬까 얼른 그 미소를 지운다. 그러고서는 재빨리 언성을 높여 말을 이어간다. 상철이 보다 제 말에 집중할 수 있게.      


“그리고 브리테니스가 아니고 브리태니커 거든. 뭘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아. 맞다! 브리태니커. 끝자가 좀 헷갈릴 수도 있지 뭐.... 암튼 근데 넌 왜 얘기 초점을 흐려. 여기서 핵심은 네가 잔인한 뇨자라는 거야. 저번에 산장에서 막 날아다니는 바퀴도 막 책 던져서 죽이고 그랬잖아. 으.. 잔인해..”      

“하.. 내가 잔인하다고? 그 질긴 랭면도 무참히 잘근잘근 잘라먹는 게 누군데?”      


비약한 논리인걸 본인도 아는지 희진이 머쓱해하며 배시시 웃는다. 웃음도 전염이 된다고 했던가. 상철도 그런 희진이 귀엽다는 듯 길고 큰 눈이 반달모양으로 변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희진이 화제를 돌린다. 불리할 땐 역시 말 돌리기다.


“근데 갑자기 냉면 먹고 싶지 않아? 저번에 갔던데 맛있었는데..”

“아 거기.. 어디더라.. 가만있자..”     


하며 상철이 휴대폰을 보는 동안. 희진은 몇 달 전 그와 함께 갔던 냉면집이 기억났다. 살얼음이 동동 뜬 육수 그릇에 담겨 있는 물냉면. 보기만 해도 가슴속까지 시원해졌었지. 얼음이 갈린 슬러시 같은 국물을 호로록 호로록, 소리를 내야 미각이 더 살아나서 선명해지던 그 맛. 소고기 육수의 맛과 향이 차갑게 더운 혀를 적신다..

아.. 이제 먹으려고 하는 순간. 얘는 이가 부실해서 한번 더 잘라야 한다고 가볍게 나를 타박하며 상철이 가위를 부탁했었지. 랭면집에서 재단사가 쓸법한 큼지막한 가위로 성큼성큼 냉면을 자르면 그의 모습.      

이런 걸 츤데레라고 하는 건가? 그동안의 그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란히 길을 걸을 땐 나를 안쪽에 세우고 자신이 차도 쪽으로 걷던 모습, 덤벙덤벙 굴어 자주 넘어지는 내게 회사 앞길 어느 쪽 콘크리트가 기울어져 있다고 차근차근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해 주던 모습, 야근이라도 하고 있으면 어디서 있다 나타났는지 꼭 출출할 때 내가 좋아하는 간식을 싸가지고 휴게실로 오던 모습... 끙.... 내가 그동안 너무 몰랐던 걸까? 혹시... 아냐.. 만나면 맨날 시비만 터는데 뭘. 오늘도 잔인하다고만 하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애써 다시 냉면집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양념과 함께 면을 슬슬 풀어주며, 입을 크게 벌리고 입안 가득히 면을 터질 듯이 넣는다. 매콤 달콤한 양념이 쫄깃쫄깃한 면과 잘 어우러져진 환상적 조합. 반찬으로 나온 무절임도 아삭한 식감으로 냉면의 미끌거림에 마찰을 더해주었고, 매콤한 양념장과 함께 먹으면 무에서 새콤하고도 달큰한 맛이 우러 져 나와 냉면의 풍미를 더욱더 이끌어 주었다. 아 다시 가고 싶네. 생각만으로 입맛이 다셔졌다.      


“오빠~ 거기 또 가고 싶다. 어딘지 알아?”

“그래. 어딘지 알아냈다. 근데 넌 먹으러 갈 때 만 오빠라고 하더라.”

“오빠가 아는 맛집이 많으니까. 헤헤.”


오빠라는 단어가 이렇게 듣고 싶었던 걸까. 평소 크게 먹을 거에 관심이 없었던 상철이 온갖 인스타며 블로그 맛집 검색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걸 보면.....            



먹은 곳: 유천냉면-서울 송파구 풍납동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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