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룡부장 Mar 25. 2021

처벌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군형법의 '항명'에 관한 이야기

   영화 1987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진 남영동의 '대공수사단'에서는 수사기법의 하나로 고문이 자행되었다. 자신들이 미리 정해놓은 진실을 말할 때까지, 피의자에게 폭행, 전기고문, 물고문, 성폭행 등의 방법으로 고통을 준 것이다. 누군가는 고문으로 인해 평생 치유할 수 없는 상처들이 생겼으며, 또 누군가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이윽고 민주화가 이루어져, 과거 남영동에서 고문을 자행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재판이 진행되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던 이른바 '고문 기술자'들 재판에서 당당히 주장했다. "저는 상급자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벌어진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


   사람들은 모두 분노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정당하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고문 기술자들의 편이 아니었다. 당시 대법원은 "상관은 하관에 대하여 범죄행위 등 위법한 행위를 하도록 명령할 직권이 없는 것이고, 하관은 소속상관의 적법한 명령에 복종할 의무는 있으나 그 명령이 참고인으로 소환된 사람에게 가혹행위를 가하라는 등과 같이 명백한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인 때에는 이는 벌써 직무상의 지시명령이라 할 수 없으므로 이에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고 판시하였다. 결국, 고문 기술자들을 법에 따른 처벌을 받게 되었으며, 이 사건은 상급자와 하급자 간 명령 복종 관계가 존재하는 다양한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군대는 구성원 간 명령 복종 체계가 가장 잘 지켜지는 조직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불법적인 행동을 하여 군사재판이나 징계를 받게 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명령을 따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면죄부가 주어질 것이라 막연히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록 명백히 위법한 명령에 대해서는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 하더라도, 상관이 직접 지시하는 것에 대해 하관이 '그것은 위법하니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용기를 내지 않았을 때는, 지시를 명한 상관과 지시를 이행한 하관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음에 대해서 분명히 인지하고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최근 군사법원에서 국선변호를 맡은 사건 중, 어느 부대의 하급자와 상급자가 나란히 음주운전과 음주운전의 공범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 것이 있었다. 둘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다른 술집으로 가기 위해 대리운전을 부르고자 하였으나 대리운전이 잘 잡히지 않았고, 이에 상급자는 하급자에게 자신의 차 키를 건네며 운전을 해달라고 말을 한 것이다. 하급자는 음주운전이 잘못된 행동임을 알았음에도 상급자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여 운전대를 잡았다가, 결국 가드레일을 강하게 충격하여 차량이 전복되는 대형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급자는 임관이 얼마 지나지 않은 초임 간부였는데, 그는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군대에선 선임의 지시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착각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깨달음의 시기가 너무나도 늦었다. 하급자는 사고로 인해 몇 개월을 병원에서 입원해있어야 했으며, 퇴원 직후 음주운전으로 인한 형사 처벌과 그에 부수하는 강력한 징계로 인해 군인 신분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상급자 역시 강한 처벌을 받고 군복을 벗게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상급자의 잘못된 지시와 잘못된 지시임을 알면서도 이를 이행한 하급자의 행동이 합쳐져 만들어낸 참사였다.


   이런 참사가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상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자신이 가진 권한의 범위 내에서 적절하고도 적법한 명령만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하급자들도 상관을 더욱 믿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 명령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올바른 명령을 지시하는 태도야말로 상관의 명령에 대해 매우 큰 힘을 부여하고 있는 군형법 등 군에 관한 입법에도 부합할 것이다.


   군형법에는 상급자의 명령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명령 위반'이라는 죄가 규정되어 있다. 정당한 명령 또는 규칙을 준수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이를 위반하거나 준수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는 내용(군형법 제47조)이다. 또한,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아니한 사람을 처벌하는 규정으로 '항명(군형법 제44조)'과 '집단항명(군형법 제45조)'를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이 죄들은 다른 군형법의 죄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벌금형 없이 징역 혹은 금고가 선고될 수 있는 매우 중한 범죄들이기도 하다.


   항명죄로 처벌을 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이미 언론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특정 종교인들에 관한 것이다. 집총을 거부하는 종교인이 훈련소에 입소한 후, 군사 훈련에 참여하라는 상관의 지시를 거부했을 때 적용된 법조가 바로 '항명'이다. 물론 최근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신념으로 인한 병역 대체 제도를 인정하게 되었기에 이러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게 되었으나, 여전히 항명죄나 명령위반죄는 다른 다양한 사례에서 적용되고 있다.


   이 범죄들은 그 죄명부터가 직관적으로 '명령 위반'과 관련되어 있기에, 많은 지휘관은 내게 이 죄를 통해 하급자를 처벌할 수 있는지를 문의하곤 한다. 오늘은 그중 가장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시험 성적 때문에 처벌을 받을 뻔한 장교 A의 이야기이다.




   장교 A는 부대 내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인 '작전'에 관한 업무 책임자였다. 사건 당시 A는 부대의 훈련을 준비하며 정말로 많은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출퇴근 기록상 훈련 전 주에는 새벽 2시 전에 퇴근한 날이 없을 정도로, A는 부대가 훈련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했다. 그러나 부대 전체의 훈련을 총괄하다 보니 A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개인 공부에는 소홀해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당시 훈련 내용 중에는 '백지전술평가(Student Paper Tactics)'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하얀 지도에 전장의 정보 및 적의 공격 예상 루트나 방어책 등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개별 시험을 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A는 그 시험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시험 당일 A는 자신의 시험지에 거의 아무것도 적지 못하여서 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게 되었다. 다른 장교도 아닌 '작전'에 관한 책임자가 시험에서 최저득점을 했다는 소식은 훈련을 주관하던 상급부대의 지휘관에게도 빠르게 전해졌다. 지휘관은 분노하여 말했다. "훈련 준비를 열심히 하라고 지시했는데, 시험공부를 소홀히 한 것은 명령 위반이니 A를 처벌해야겠습니다!"


   당시 군검사로 일하고 있던 나로선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나야말로 지휘관의 지시에 대해 '명령 위반'을 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시험이라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상황에 따라 노력 여하와 무관하게 결과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단순히 시험에서 저득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며, 만약 이러한 선례를 남기면 얼마든지 악용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근본적으로 군형법의 항명죄에서 말하는 명령은 상관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군사상의 명령을 말하는 것으로서,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라'와 같은 지시는 이러한 명령이 되기에 부족하다는 법적 견해를 바탕으로, A에 대한 처벌은 불가하다는 의견을 강하게 표명했다. 당연히 반응은 싸늘했다. 이윽고 그렇다면 징계로 처리하라는 지시가 다시 내려왔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지시 역시 따를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처벌 불가에 관해 주장하였고, 심사숙고 끝에 지휘관께서도 결국 의견을 존중해주시어 A는 낮은 시험 점수로 인한 처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다행인 일이었다. 당시 지휘관께선 절차와 법규를 매우 중시하는 분이셨기에 좋은 결과가 도출될 수 있었으나, 만약 절차와 법규보다 자신의 권위만을 앞세우는 지휘관을 만났었다면 우리는 정말로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상급자의 명령이 갖는 무게와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것도, A를 처벌하라는 것도, 모두 상급자의 지시였다. 그리고 그 지시에 따라 많은 사람의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하급자가 명령에 따르는 것은 중요한 의무이지만, 적법하고도 적절한 명령을 내리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상급자의 의무임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상명하복의 지휘 체계를 통해 유지되는 군 조직, 이 조직의 구성원 모두가 한 번쯤은 자신의 지시, 명령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런 군사법원의 평범한 오후 이야기를 마친다.




   거의 3주 만의 글입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죄송하고 또한 감사드립니다. 인사이동 시기이기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사건들과 인수인계 등을 정리하다 보니, 브런치 글 작성에 소홀해지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내용으로 독자님들을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전 12화 '전역'이 모든 것을 끝내주지는 않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