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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Sep 03. 2023

쌀, 재난, 국가

한국에서 이웃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 

1. 신선하지 않은 비교가 될 수 있지만, 역사학의 역할은 과거의 사건을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을 통해서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복원하는 데 있다. 손상되었거나 감춰졌던 미술작품을 복원하는 미술 복원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사회과학의 목적은 철저하게 “왜”라는 단어에 천착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 사건이라는 결과를 끌어낸 원인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컨대 “왜” 인류의 4대 문명은 모두 강을 필수적으로 수반했는가? “왜” 산업혁명은 당시 가장 앞선 문명을 자랑하던 중국이 아닌 영국에서 발생했는가? “왜”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공산주의 혁명은 영국이 아닌 러시아에서 일어났는가? “왜” 동아시아 3국 중 일본이 가장 문호개방을 서둘렀고 근대화에 성공했는가?     


    사회과학자들은 병적일 정도로 원인에 집착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늘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인과관계이며 왜라고 묻기를 그치지 않는다. 특히 적은 수의 독립변수로 최대한 많은 종속변수를 설명하기를 갈구한다. 즉 사회의 여러 복잡한 현상들을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요술 지팡이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요술 지팡이는 있을 수 없거니와 그렇게 보이는 것 같은 지팡이를 찾기도 몹시 어렵다. 이들은 동료 학자들로부터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가장 많이 듣게 되는데, 이는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하려는 겁 없는 시도에 대한 주홍글씨다. 마치 마르크스가 세상사 모든 문제가 그놈의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회학자 이철승이 대담하게도 이 요술 지팡이 프로젝트에 도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일견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 책의 주장은 명쾌하다. 왜 한국은 협력과 경쟁 문화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가? 왜 한국은 불평등한 국가가 되었는가? 혹은 왜 그렇게 불평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왜 한국만 유독 연공제를 고집하는가? 


간단하다. 모두 고대부터 이어져 온 벼농사 때문이다.      


2. 본론으로 들어가자. 저자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쌀에 중독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첫째, 맛있고, 둘째, 높은 생산력 때문이다. 탄수화물이 맛있는 건 쌀 뿐만 아니라 빵도 그렇다. 더 중요한 이유는 쌀이 밀이나 보리보다 단위 면적 수확량이 두 배가 넘는다는 데 있다. 또한, 영양분도 풍부해서 부족한 것은 비타민과 철분 정도다. 쌀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쌀은 타 곡물에 비해 높은 수확량을 제공하지만, 그에 비례해 막대한 양의 물이 필요하다. 반면 밀과 수수, 목축은 그만큼의 물이 필요 없다. 그리고 쌀은 단기간에 고도로 집중된 집단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그저 잘 쟁기질 한 밭에 밀알을 뿌려주기만 하는 밀과는 차이가 크다. 벼농사는 이른 여름부터 늦가을 추수까지 마을 인원 모두가 나와 순서가 정해진 논에 차례대로 농사를 짓는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공동노동 개별소유”다. 즉 일은 다 같이 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산출물은 내 것이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경제 모델이다. 자본주의 모델에서는 개별노동해서 개별소유하고, 반대로 공산주의는 공동노동, 공동소유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북유럽 사회주의 모델이 개별노동 개별소유하되, 개인이 소유하는 몫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가져가 재분배한다.      


    어쩌면 이 “공동노동 개별소유” 모델에서 모든 것이 설명될지도 모른다. 첫째, 이 모델은 엄청난 협업 네트워크를 자랑한다. 장점이다. 농번기에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농사일에 집중해야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유전자는 오늘까지도 강력하게 영향을 미쳐, 동아시아, 특히 한국의 강력한 뭉치는 문화를 설명한다. 97년 IMF위기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전국적으로 확산된 금 모으기 운동(당시는 SNS가 활성화되기도 훨씬 이전이라 더욱 놀랍다),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 그리고 2008년 이후로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은 듯한 광화문 집회까지. 


    둘째, 이 모델은 그러나 열심히 작업한 결과를 철저하게 가족 단위 혹은 개별 소유한다. 그런데 분명 논마다 수확량이 일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질투와 시기가 뒤따랐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분명같이 뜨거운 뙤약볕 아래 고생하며 일했는데 왜? 그 다음해에도 공동작업의 구조는 변함없었을 것이다. 다만 바뀐 것은 미묘하게 벌어지는 근거 없는 의심과 신경전. 다른 이들이 내 논에서는 덜 열심히 일한 것은 아닌가? 나만 모르는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닌가? 왠지 이웃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단 말의 출처를 알 것만 같다. 


    핵심은 같이 일했기 때문에 결과도 같아야 한다는 나름의 정의에 입각한 사고 때문에 그렇다. 반면 밀 문화권은? 밀은 혼자서 뿌리거나, 개별 가족 단위로 뿌려도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수확량이 달라도 남을 탓할 이유가 전혀 없다. 즉,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공동노동 개별소유”는 협업과 경쟁의 이중주다. 한편으로 협업을 통한 높은 효율성과 성취를 달성하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서로 눈치를 보며 관계에 속박당하는 치열한 경쟁 구도가 펼쳐진다. 몹시 피곤하다. 심지어 마땅한 탈출구도 없다. 과거에 응시할 정도로 뛰어난 수재가 아니면 평생 한 마을에서 다른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혹여나 그때 그 시절 낭만적 개인주의 감성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 있었다면 몹시 불행했을 것이라 상상된다.      


    셋째, 약간 결이 다르긴 하지만, 집단 노동력이 투입된 벼농사는 한편으론 대단히 위계적이었다. 우선 어느 집 논부터 시작해서 어떤 차례로 농사를 지어야 할지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벼농사는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 즉, 마을의 연로자들이 자연적인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모내기부터 수확까지 일련의 기술들은 세대에서 세대 간으로 전수됐다. 부모 세대가 자식 세대를 가르치는 도제식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권위다. 여기에 어느 순간 유교가 스며들면서 한반도의 문화는 철저한 위계적 집단주의 문화로 굳어진다. 어떻게 보면 그 어느 지역보다도 한반도가 부작용 없은 유교이식 수혈이 가능한 적합한 토양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보자. 서구의 강압에 의해 근대가 열렸고, 한국전쟁이 벌어졌다 끝이 났으며, 한반도가 분단이 되었고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어 한강의 기적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때 이 모든 과정을 이끈 이들이 누구였겠는가? 바로 “공동노동 개별소유” 모델의 후예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겠는가?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이다. 나이 많은 이들의 권위를 세워주고 순종하며 철저하게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는, 그렇지만 동시에 남보다 내가 더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리를 고이 간직한채로.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디엔에이가 그대로 답습되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유독 한국만이 연공제 임금테이블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저자의 주장은 단호하다. 연공제에서 직무급제, 직능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연공제란 무엇인가? 같은 연차에 속한 이들이라면 이들의 창출하는 업무성과가 어느정도는 엇비슷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에 성과와는 상관없이 연차가 쌓이면서 임금이 올라가는 구조를 뜻한다. 문제는? 나이가 많다고, 연차가 높다고 성과가 비례해서 올라가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점점 개인주의 문화에 익숙한 세대들이 사회에 진입하면서 분명 아무일도 안하는 것 같은 저 나이든 부장들이 나보다 2배 이상의 연봉을 받아가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조직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지금 이들의 높은 인건비 지출 때문에 특히 공공부문의 수익구조가 악화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때문에 비정규직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또 다른 불평등을 낳고 있다는 데 있다. 최근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직도 연공제의 아성은 단단하기만 해 보인다.      


    3. 이제 재난과 국가를 다룰 차례다. 한반도가 위치한 동아시아는 지리적으로 재난에 매우 취약하다. 특히 벼농사는 물에 민감한데, 물이 부족할 경우(가뭄)와 넘치는 사태(홍수)에 대한 의존성이 높다. 저자는 수많은 역사 데이터 분석을 통해 가뭄에 제때 대처하지 못한 왕조는 반드시 몰락했다는 실증적 주장을 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 이후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아니 지금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 집단은 재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재난재해가 발생했을 때 유력 정치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노란색 잠바에 목장갑을 끼고 현장에 달려나가는 것은 왜일까? 반면 사고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나, 국민이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대응을 하지 않은 그 대가는 혹독했다.      


    어쨌든 요지는 한반도의 국가는 재난에 특화됐고, 대부분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피해자를 구제하는 선별적 복지정책을 펼쳐왔다는 데 있다. 문제는 이 선별적 복지정책이다. 저자의 예리한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 불평등의 또 다른 원인이다. (물론 이 원인의 원인은 쌀이지만) 무슨 말인가? 과거에는 사회의 하부구조가 모두 마을, 가족 단위에서 마련되어 있었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아도 마을 단위에서 완전 자급자족 가능했기 때문에 국가는 물 관리와 재난 대비책 마련 등과 같은 최소한의 개입으로 특징지어진 야경국가의 역할만 하면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 장을 할애하면서 다양해지고 강력해지는 자연재난 그리고 이것이 경제를 마비시키면서 발생하는 소득감소는 특히 사회 취약계층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면서 소득 불평등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한다. 또한, 줄어드는 인구와 맞물려 높아지는 청년실업률과 노인 빈곤, 사회적 자살, 그리고 기후변화로 인한 사회적 비용까지, 국가가 개입해야 할 영역이 갈수록 많아지는데 이전의 선별적 복지만으로 한계라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이 모든 원인이 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니. 매일 마주 보던 쌀이 심오하게 보인다. 이제부터라도 전 국민의 쌀 섭취를 금지해야 하는가? 쌀이 근본 원인인 것은 맞지만 이미 수천 년이 흘러간 지금 쌀에서부터 파생되어 고착된 구조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연공제를 폐지하고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라. 이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시작만큼 결론도 단순하다. 동시에 단호해서 어쩌면 이 이야기를 위해 쌀이란 소재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 많은 현상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동아시아의 문화를 깎아내리는 서구의 근거 없는 오리엔탈리즘에 우리도 모르게 휩쓸려 있던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코로나19 위기에서 정부의 방역지침을 잘 따랐던 모습을 보고 서구 일부 지식인들은 국가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순응이라 비판했지만, 그들은 자유와 권리를 잠시 내려놓고 협업의 기적을 보여주는 동아시아 모델의 진가를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집단 속의 주체로 살아가기 때문에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맞다. 늘 경쟁 속에 놓여 있기에 불행한 존재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 모든 것이 쌀 때문이었다니. 아니, 쌀이 정답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분석을 시도할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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