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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는살림 Dec 19. 2023

고민할 시간도 아까우니까

체크리스트, 내가 나에게 할 일을 준다.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참 오래도 걸렸지만. 책도 사서 읽고 어떻게 하는지는 알겠다. 그런데 몇 년, 아니 십여년동안 하지 않았던 것을 시작하려니 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다. 일단 눈에 보이는 쓰레기부터 치워보자. 쓰레기 봉투 하나 들고 거실, 주방, 방, 베란다 집을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니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 여기도 저기도 다 시급해보여서 이것 저것 손대다보니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근데 막상 집을 보면 한게 아무 것도 없어 보이니 억울하기까지 하다. 


몇 권의 책에서 보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작은 곳부터 시작하라는 것. 처음부터 너무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작은 곳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가장 먼저 주방 서랍문을 열었고 서랍 하나 정리하면서 수많은 물건을 비웠다. 정육점 쿠폰 29장을 버릴때 가장 속이 쓰렸다. 30장을 모으면 돼지고기 앞다리를 받을 수 있었는데 그 동네정육점은 이미 문을 닫고 없어졌기 때문이다. 쿠폰 정리가 잘 되어있어서 29장이 있다는걸 일찍 알았다면 폐업하기 전에 어떻게든 한 장을 구해서 앞다리살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안쓰는 수저부터 쓸데 없이 많았던 고무줄까지 왜 가지고있었는지 의아한 것들을 비우고 정리하니 비로소 정리를 했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서랍 문을 닫으면 눈에 보이는 풍경은 같다. 뒤이어 오는 생각. '다음엔 어딜 정리하지'


일단 눈앞에 보이는대로, 시급한 곳을 정해서 정리를 이어갔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리 하는 곳만 하게 되고 문을 여는 곳만 열게 되었다. 분명 정리가 필요한 곳이 있을 텐데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고 손이 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체크리스트. 최대한 집에 있는 모든 공간을 살펴보고, 내가 모르는 물건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하나씩 확인하다보면 꼼꼼하게 집을 살펴볼 수 있을거라는 기대로 정리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였다. 집 도면을 대충 따라 그려서 구역을 구분한 다음, 거기서 내가 하루에 할 만한 공간으로 나눠서 만들었다. 예를 들어 거실-거실장, 안방-옷장 두 칸-수납장 서랍 두 개 이런 식으로. 


계획이 틀어져도 타격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이라 '순서대로 하나씩 해치우겠어'라기보다는 쭈욱 훑어보며 그날 컨디션에 따라 할만한 것을 골라서 해냈다. 같은 공간인데 여러개로 나눠져 있는 경우에는 진짜 하나만 할 때도, 힘이 좀 남아돈다 싶을때에는 여러개를 한꺼번에 하기도 했다.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이런 정리 말고도 일상에서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것들도 있었기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래걸려도 2시간 안에는 끝내기로 다짐하고 하나씩 실행해나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피드백. 정리할 때 어떤 것에 집중해서 정리를 했는지, 무엇이 어려웠는지, 최적의 동선은 무엇인지 등등 정리하며 들었던 생각을 적어놓는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이런 기록들이 다음 정리를 할 때, 혹은 정리된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체크리스트를 만든 뒤 내 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오전에 아이들 등원시킨 뒤 바닥청소, 세탁기 작동시키고, 식탁 위에 있던 것들을 싱크볼로 옮겨놓고 체크리스트를 보면서 그날 할 것을 확인 한 뒤 정리를 시작한다. 끝나면 빨래를 개고, 그날 저녁에 먹을 것을 준비하고, 설거지할 것이 있다면 설거지를 하고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내심 뿌듯한 점은 '뭐하지'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동안 잘 살펴보지 않았던 공간을 살펴봤다는 것이다. 


모든 항목에 '했다'는 표시를 한 날, 집이 극적으로 변해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전히 거실을 어질러져있고, 싱크대에는 설거지할 것들이 쌓여있다. 그래도 다른점이 있다면 어질러져 있는 것을 정리하는 데에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각각 제자리에 가져다놓으면 되니까. 그걸 보는 내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사람 사는 집이니 어질러지기 마련이고 물건을 꺼내 쓰다 보면 흐트러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는 이유는 '정리하면 되니까'하는 자신감 때문이다. 불필요한 물건을 비우고 조금씩 질서를 만들어보는 경험을 해보니 하면 된다는 생각에 여유가 생겼달까. 


지름길은 모르겠고, 일단 매일 조금씩이라도 하면 어떻게든 나아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조금은 느려도 그 과정속에서 단단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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