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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감 Aug 17. 2023

자윤

    입김이 뽀얗게 피어오르는 한 겨울날의 퇴근길. 사람들은 저마다의 행선지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먼저 퇴근한 나는 자윤이 일하는 사무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뽀얀 입김을 수차례 허공으로 보냈다.


    5층짜리 건물의 입구에서 하나둘씩 사람들이 무리 지어 나오기 시작했고 열다섯의 사람이 빠져나가고 열여섯 번째로 자윤이 나왔다. 그녀는 입구를 서성이며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나의 시선을 그녀가 느끼길 바라며 곤히 잠든 아이를 바라보듯 차분히 자윤을 지켜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느끼지 못했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표정이 없던 얼굴에서 눈이 먼저 얕은 곡선을 그렸고 다음으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익숙하고 그리운 미소다. 나는 오른손을 위로 뻗어 좌우로 흔들었다.  


    강아지랑 고양이 둘 중에 하나만 기르라면 뭘 기를래?

    앞뒤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피해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중 자윤이 물었다.

    "고양이가 난 좋아. 귀엽고 예쁘잖아."

    "강아지는 안 귀엽고 안 예뻐 그럼?"

    "차갑고 도도한 이미지가 있잖아 고양이가. 나는 그런 점에 끌리는 것 같아. 강아지들처럼 너무 적극적인 타입은 별로."

    "웃겨. 강아지들이라고 다 너한테 잘해줄 것 같다면 큰 착각이지." 어이없다는 듯이 자윤이 웃었다.

    "우리가 출근하면 홀로 긴 시간을 지내야 하니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지낼 수 있는 아이가 좋을 텐데." 팔짱을 끼고 한숨을 뱉으며 내가 말했다. "어떻게 그런 걸 알고 데려올 수 있겠냐만."

    하늘은 회색빛으로 먹먹하게 물들어있었다. 조용히 눈이 내릴 것 같았다.

    "나는 보면 알 수 있어." 천연덕스럽게 자윤은 말했다. 자윤을 알기 전이었다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이러한 말은 실제로 이루어지곤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그렇다고 하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게 됐다. "그리고 외로운 게 걱정이면 둘을 데려오면 되지." 자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바웃타임처럼 셋을 키워도 좋고. 셋이라면 똑똑한 아이가 하나 있어도 덜 똑똑한 둘이서 서로를 보며 위안 삼을 수 있잖아.” 레이첼 맥아담스는 반려동물을 셋 갖고 싶다 한 게 아닐 텐데.

    

    하나도 아니고 둘 이상이라. 수없이 날리는 털과 찢어진 소파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집안 곳곳에 털이 날리는 건 상관없지만 비싼 값을 치르고 장만한 소파가 물어뜯기는 것은 상상만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소파를 사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반려동물이 할퀴어도 끄떡없는 소파' 같은 걸 사지 않았을까.

    "우리의 작은 집이 시끌벅적해지겠네." 반쯤 체념했다. 그저 애들이 소파를 건드리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가장 가까운 역까지는 걸어서 20분 넘게 걸리고, 5분 거리에 편의점이 있고 그 옆에는 코인 세탁소가 있는 이곳에 우리 두 사람이 살게 된 지도 1년째다. 냇가를 따라 이어져있는 산책로를 날이 좋을 때면 둘이서 다리가 저릴 때까지 몇 바퀴든 빙빙 돌곤 했다. 직장이 같은 역 방면에 있기 때문에 1년 동안 특별한 일이 없다면 같이 출근하고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도 함께인데 출근길, 퇴근길까지 붙어있고 싶냐고 혹자는 물을지도 모른다. 그 점에 대해 우리도 한 번씩 생각해보곤 했다. 24시간 중 일하고 있는 9시간을 빼고 쭉 붙어있는 셈이니 말이다. 가끔씩 다툴 때가 난감하긴 한데, 그때도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는 걸로 합의를 봤다. 어느 쪽이든 화가 덜 풀렸다면 다른 칸에 올라타버리기도 하지만 보통 같은 칸에 타서 내리기 전에 화해하려고 노력했다. 냉전을 길게 끌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같은 지하철, 비슷한 시간대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아무래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마가 정수리까지 올라간 50대 남성은 양복을 잘 차려입고 책을 읽고 있었다. 볼 때마다 책을 읽고 있거나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커버에 가려져 있어 어떤 책을 읽는지 알 수 없지만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를 내내 유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선캡을 쓰고 마스크를 두르고 있는 할머니는 찬거리를 담은 장바구니를 무릎에 이고 있었다. 어제는 장바구니 밖으로 대파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는데 오늘은 고등어와 눈이 마주쳤다. 바다내음이 코끝을 찌르고 갔다. 거북목에 렌즈가 두꺼운 안경을 낀 남자는 난간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목에 두르고 있는 목도리는 오래됐는지 올이 다 나갔고 한때는 선명했을 붉은색은 희미하게 바랬다. 남자가 내뱉는 입김이 목도리에 튕겨 안경에 김이 서렸다 사라졌다 반복하고 있었다. 남자의 얕은 숨은 끈덕지게 안팎으로 공기를 교환하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고, 남자는 지하철이 멈추는 반동에 잠에서 깨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이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진 않았나 확인하고서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음에 안심한 그는 다시 고개를 난간에 파묻고 곤히 잠을 청했다. 자세가 바른 중년신사와 선캡 할머니 그리고 거북목의 남자를 뒤로한 채 우리는 역사를 빠져나왔다.


    해는 이미 졌고 하늘이 까맣게 물들어도 거리의 환한 불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아직 한 달 정도 남았지만 일찌감치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듯 형형색색 화려한 장식이 곳곳에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역사 앞에도 못 보던 트리가 놓여있었던 것 같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무더운 여름이, 영원하길 바랐던 가을이 훌쩍 지나가고 벌써 달력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콧등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눈 오네." 자윤이 말했다. 솜털 같은 눈이 낙하하고 있었다.

    

    "올해 첫눈인가?"

    "응. 올 겨울에 처음 내리는 눈."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얼마 안 있어 그칠 것 같은 얇고 얕은 눈이지만 반가웠다. 어떤 이는 사진을 찍어 누군가에게 첫눈 소식을 전하고 어떤 이는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눈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볼과 입술에 차가운 눈이 내려앉았다. 체온에 녹아내려 금세 사라졌지만 볼과 입술은 작은 냉기를 기억했다.


    "주말에 보호소에 한번 가볼까?" 말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자윤에게 물었다.

    "고양이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귀찮으리만큼 애교가 많은 강아지라도?"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단은 둘. 셋은 천천히 생각해 보자. 애들끼리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자윤이 어깨를 피고 가슴을 탁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 마.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될 거야."

 

    주말이면 식구가 늘어날 것이다. 추운 겨울은 외로운 생명을 가족으로 맞이하기 좋은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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