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습하고 끈적하고 찐득한 더위다. 30여 년 전 7월의 마지막 주에 나를 낳을 당시 어머니는 무척 더운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때의 더위보다 지금의 더위는 더욱 뜨겁고 버겁겠지. 물가와 기온은 오르기만 한다.
에어컨 없이는 잠도 제대로 못 자겠다. 전기세를 생각해서 좀 덜 쓰고 싶지만,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쓰겠냐는 자기 합리화를 스스로에게 되뇐다. 야, 더울 때 쓰라고 만든 건데 써야지! 안 그래?
서재의 창 너머의 풍경은 이렇다. 높은 오피스텔 건물이 있고 옆에는 지방 법원과 그 주차장이 보인다. 법원 뒤로는 우거진 숲이 있는데 그들은 대로 가운데에 심긴 가로수들과 함께 선명한 녹빛을 발산하고 있다. 그린벨트 뭐 그런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오랫동안 숲이 남아있으면 한다.
시야에 나무들이 많아서 좋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주차장에 가지런히 정리된 차들을 보고 있어도 마음이 놓인다. 보드게임 중에 승용차와 트럭 모양의 블록을 정해진 방향으로 밀고 당기며 특정한 자동차를 이동시키는 게임이 있었는데. 나는 그 게임을 잘하진 못했다. 뜻대로 게임이 안 풀리면 답답해서 판을 엎어버렸다. 밥상 뒤엎기, 아니 주차장 뒤엎기.
나무의 녹색은 여름이면 더 깊이감이 생긴다. 비가 오면 사물의 모든 색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진해진다. 비 냄새를 좋아한다. 창문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반갑다. 하지만 흐린 하늘과 비가 올 때 외출할 일이 있는 것은 싫다. 비에 홀딱 젖은 양말과 신발의 축축함은 싫다. 홀딱 젖은 우산을 들고 만원 버스에 올라타는 일은 참 난처하다. 버스의 냉방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른 사람의 우산의 물기에 바지가 젖을 때면 곤란하다.
저 멀리 빽빽하게 솟아오른 건물들 너머에 병풍처럼 산이 주욱 펼쳐져 있다. 적어도 서재의 창이 담아내는 세상에 산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밤새 닫아둔 커튼을 활짝 걷어올리고 창문을 열어 환기부터 한다. 오늘의 하늘이 맑은지, 미세먼지는 덜한지 판단하는 기준은 산이 얼마나 선명하게 보이냐는 것이다. 여름이 시작되기 전, 그러니깐 4월과 5월에는 하늘이 자주 흐렸다. 안개가 산중턱에 뭉쳐 있거나 자욱한 먼지가 산을 꽁꽁 숨겨두는 일도 빈번했다. 법원의 숲조차 잘 보이지 않을 때도 많았다. 7월의 장마가 지나고 나니 하늘은 더없이 맑다. 비구름과 바람이 먼지를 다 씻어내고 밀어냈기 때문일까. 산의 구석구석이 뚜렷하게 보일만큼 깨끗한 하늘이 이어져서 좋다.
응원하는 야구팀이 이길 때가 좋다. 매 경기를 이겼으면 좋겠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지고 있던 경기를 뒤집어 이길 때만큼 짜릿한 건 없지만 다 잡은 경기가 엎어지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도 없다.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은 경기시간이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래서 할 일도 내팽개치고 중계를 볼 때가 있다. 저녁을 먹으며 아버지와 같이 야구를 보는 일이 많다. 내가 월요일에는 야구 경기가 없다고 매주 말하지만, 아버지는 화요일이면 어제 경기는 누가 이겼냐고 매번 내게 묻는다. 아버지! 월요일은 최강야구 밖에 안 한다니깐!
같은 팀을 응원하는 친구와 생중계를 보며 문자를 주고받는다. 아니, 거기서 그렇게 치면 어떡하냐. 야 그걸 못 잡냐. 이래서 가을에 야구하겠냐! 방구석 전문가들은 화가 많다. 애증이다 야구는. 오늘 졌어도 내일은 잘하겠지, 기대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요식업에 종사하는 친구가 부산에 좀 놀러 오란다. 자기네 음식이 맛있다고. 실제로 무척 맛있어 보였다. 우리 동네에도 분점 하나 내주면 내가 진짜 자주 갈 텐데. 녀석의 가게는 연일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이미 바빠 보이는데 또 내가 친히 가서 더 정신없게 만들어주길 바라는가? 지독한 녀석.
바다가 좋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바다는 무척 귀하다. 안 그래도 본가가 부산인 다른 친구가 이번에 함께 가자고 했다. 잠은 자기네 집에서 자자고. 이대로라면 지독한 하우스키퍼인 내가 정말 부산에 갈지도 모르겠다. 친구네 음식을 먹으러, 친구를 보러, 바다를 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