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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현 Feb 02. 2022

47) 몸은 멀어도 마음만은 가까이

- 강릉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4부)

 강릉으로 이주하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앞으로 강릉에서 살 거야.'라고 말하자 한결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거기서 뭐 하고 살 건데?!" 

 "돈은 또 어떻게 벌고?" 

 "이참에 아예 인간관계 싹 다 끊으려고?!" 


 2010년대 초반 제주살이 붐이 일고, 2020년에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하는 사람이 늘면서 지방에서 한달살이를 하거나 그곳에 아예 눌러앉은 사람이 많아졌다. 하지만 전체 인구 이동수에 비하면 그 비율은 크게 높지 않았다. 주요 산업의 일자리는 대부분 수도권에 포진돼 있는 데다 재택근무 또한 한시적이었기 때문이다.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빠져나가는 수 보다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들어오는 수가 더 많았다. 특히 20~30대 청년들의 이동이 활발했다. 그러다 보니 매년마다 수도권 집중 현상이 이어졌다. 정부에서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부었으나 수도권으로 몰리는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30대 세대에서 지방살이를 시작하는 흐름이 생겼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했다. 우리는 그 소수자 중 하나였다.


 '모든 인맥을 정리하면서까지 지방으로 가고 싶냐.'는 지인들의 조언은 직설적이었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적어도 계속 서울에 살았다면 오랜 기간 쌓아온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서울에서 지내면 직장 동료, 퇴근하고 오랫동안 못 만난 대학교 친구들, 동호회 크루원들을 만나는 일도 가능하다. 코로나 때문에 만나기 어려워졌을지언정 마음만 먹으면 3개월 또는 반년마다 가볍게라도 얼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방에 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집에서 출발해 서울까지 아무리 빨리 가도 2시간이다. 경기와 인천도 거주지에 따라 엇비슷하게 걸리는 지역이 있겠지만, 강릉은 시도 간을 넘기 때문인지 왠지 더 멀게 느껴진다. 강릉살이 초반에는 서울에 모임이 있을 때 종종 놀러 오라는 말을 듣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 한두 번뿐. 시간이 지나면서 연락을 나누는 횟수도 만나는 빈도도 뜸해졌다. 자연스레 모임에 오라는 말도 점차 줄어들었다. 


 강릉에서 생활한 지 3년째. 그동안 지내면서 느낀 만족도를 점수로 환산하면 거의 백점에 가깝다. 서울에서 일할 때 보다 확연히 줄은 소득과 상대적으로 부족한 문화생활은, 강릉 생활이 가져다주는 행복감에 비하면 별 문제가 안 됐다. 시원하게 뻥 뚫린 도로, 출근길에 차 안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마치 살아있듯 힘차게 파도치는 바다의 모습,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하늘, 그리고 저녁 있는 삶. 자연의 섭리에 따른 규칙적인 생활 패턴이 우리를 건강하게 살 찌웠다. 거기에 강릉에서 새롭게 만난 인연까지. 불만을 가질만한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단 한 가지, 예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과 자주 못 만나는 점만은 아쉬웠다. 그것은 다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으니까. 강릉에서 살면 만나기 힘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왔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친구들에 대한 그리운 감정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면서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켜졌다. 처음에는 버티다 보면 금방 상황이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방역수칙이 엄격해졌다. 인원이며 시간이며 점점 행동에 제약이 생겼다. 사태는 나아질 기미를 안 보이고 피로는 조금씩 쌓여갔다. 코로나로 인해 마음 놓고 놀러 가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 쳇바퀴 돌듯 집과 매장을 오가는 일상에 지쳐갈 무렵이었다. 친구들이 강릉으로 놀러 왔다. "개업 축하해." "속초 놀러 온 김에 겸사겸사 들렀어요." "인스타로만 봤는데, 한 번 매장 보러 와 보고 싶었어." "가족 여행으로 다 같이 강릉 왔는데, 운동할 겸 저만 나왔어요." 서울과 경기에서 평택과 인천에서 그리고 부산에서까지. 연락도 없이 깜짝 방문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직접 오지 못하더라도 카톡이나 SNS 메시지로도 개업 축하한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강릉살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선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만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거주지를 옮겼다. 동시에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의 거리만 가깝다면 몇 년이 지나든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엘제아르 부피에가 한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 나무를 심은 것처럼, 우리도 어디에서든 세속적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 "형은 참 그때 그대로네요." "너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네." "이렇게 이야기 나누니까 옛날 생각나고 편하네."같은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만났다. 비록 서울에 있을 때처럼 정기적으로는 못 만나지만 그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겨우 1,2시간 본 걸로 그 사이에 일을 전부 풀어내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라지만, 이렇게라도 얼굴을 봐서 반가울 따름이다. '마음의 거리만 가까우면 제 아무리 먼 곳에 살아도 때가 되면 만날 수 있어.' 앞으로 친구들의 머릿속에 강릉 하면 우리 부부가 떠오르도록 이곳에 안정적으로 정착해야지. 1년, 5년, 10년이 지나도 친구들이 마음 편히 우리에게 연락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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