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집 앞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입 밖으로 내쉬었다. 고단했던 하루에 뜨겁게 내쉰 한숨은, 입김이 되어 하늘로 흩어졌다. 늦은 퇴근시간 열심히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호흡은, 하늘로 솟아올라 밤하늘의 무거운 구름이 되었다.
하늘의 구름은, 열심히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내뿜은 뜨거운 호흡의 뭉텅이일까. 뜨거운 입김들은 아름답고 차가운 결정이 되어 땅으로 푸슬푸슬 떨어지고 있었다. 정류장에 서서 아무도 없는 거리에 내리는 고된 하루의 위로를 눈에 담았다.
집에 들어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바른 뒤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른한 기분에 금방 잠이 들 것 같았지만, 아쉬움에 금방 잠들 수 없는 밤이다. 오늘 하루 회사를 다녀온 시간 말고 내 시간은 지금 뿐이었다. 침대에 누워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작은 바보상자 안의 SNS를 실행시켰다. 새로 고침을 누르니 최근 게시물에 대학 후배의 여행사진이 걸렸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촬영한 사진이었다. 열차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 후배는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겠다고 마음먹었던 기억이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에 치이고 돈에 치이고 게으름에 치이고,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내가 어디서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원이 꺼진 휴대폰 액정에는 동물원에 갇혀 피폐해진, 목적 없이 그저 그냥 살아가는 원숭이 한 마리가 보였다. 나는 어디 갔을까.
노트북을 켜고, 검색창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 타는 방법’을 검색했다. 역시 세상에는 꼼꼼한 사람들 천국이다. 포스트 몇 개를 확인했을 뿐인데, 횡단 열차 예약, 루트, 여행지 등 여러 가지 정보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방법’만 검색했을 뿐인데 나는 이미 여행을 떠나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관한 흥미로운 여러 가지 포스트를 잠깐 확인했을 뿐인데,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을 보내려면 이제 그만 자야겠다.
눈 뜨고 일하는 내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생각밖에 없다. 하루 종일 멍하니 직장 상사가 나에게 쏟아내는 불만들을 이어져 있는 귓구멍을 통해 흘려내고, 손에 안 잡히는 일들을 억지로 쓸어 담아 처리했다. 그리곤 일을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와 노트북을 켰다. 귀신에 홀린 듯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렇게 짜게 된 일정은 “23일간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이라는 제목이 되어 노트북 바탕화면에 저장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비행기표가 내 휴대폰으로 날아왔다. 여행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주뿐이었다.
직장에는 무조건 12월까지만 하고 관두겠다고 얘기했다. 사실 이렇게만 보면 갑작스럽게 3주 뒤에 퇴사하겠다는 책임감 없는 사람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두겠다고 말한 시점은 사실 9월이었다. 회사 사정을 봐주다 끌려온 3개월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학연, 사회관계, 의리, 끝맺음을 잘해야 한다’라는 ‘좋은 소리’로 예쁘게 포장된 수갑을 절단 내기 충분했다. 무슨 욕을 들어먹든 더 이상 정도, 미련도 없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은 꼭 혼자 떠나고 싶었다. 과거에 혼자 내일로 여행을 갔을 때 좋은 추억들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일로는 어디를 가든 말이 잘 통하는 국내여행이었고, 이번 여행은 정보도 많이 없이 말도 잘 안 통하는 해외여행이라 그런지 두려움이 엄습했다. 괜히 너무 빨리 비행기표를 끊어버렸나 싶기도 하고, 지금부터 간단한 러시아어라도 공부해야겠다 싶었다. 은근히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3주도 안 남았는데.
혼자 해외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3주 전부터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슴속에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했다. 혼자 떠나려고 마음먹은 여행이었지만, 사실 같이 가고 싶은 친구 한 명이 자꾸 떠올랐다. 학창 시절부터 고마운 것도 미안한 것도 많은 좋은 친구였다. 분명 인생에 도움이 될 소중한 경험을 소중한 친구와 함께 나누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때 마침 친구의 생일이 다가왔고, 생일도 축하해 줄 겸 의견을 물어보러 주말에 서울에서 강릉으로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강릉 번화가의 한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생일을 축하했다. 나와 친구의 생일은 겨우 이틀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짜 놓은 23일간의 횡단 열차 계획을 보여주며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열심히 학업에 열중하던 친구였기 때문에, 학업 큰 피해가 생길지도 몰라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밤새 얘기를 나누고 나서야 친구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날 맨 정신에 의사를 확인한 뒤 비행기표를 결제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자취방을 나섰다. 3주밖에 안 남았는데 되돌아 가는 길 같은 것은 없었다.
주머니의 진동에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인웅이라는 오랜만에 만나는 이름이 보였다.
“여보세요?”
몇 년 전 스키장에서 기숙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만났던 형이었다. 어제 내가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보낸 연락이었다. 우연히 형도 근처에 놀러 왔다며 같이 아침식사 후 서울로 돌아가자는 말에 흔쾌히 “OK”라고 외쳤다. 그러고 나서 성진이에게 물었다.
“괜찮아?”
뭘 괜찮아… 이미 혼자 오케이 했으면서;;
그렇게 셋이 만나 강릉 길거리 국밥집에 앉아 뜨끈한 국밥을 주문했다. 밥을 먹으며 성진이에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을 알려줬다. 그러자 옆에서 듣던 인웅이 형이 갑자기 자기도 가고 싶다며 같이 가도 되는지 물었다.
“으…응??”
뭐지? 내 계획에 없던 이 상황은?
한 달 동안 베트남 살기를 계획했던 형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꼭 타보고 싶었다고 했다.
사실 조금 불안했다. 성진이와는 여행을 한 번 다녀와서 서로 여행 스타일을 꽤나 알고 있었지만, 인웅이 형의 여행 스타일은 알지도 못 하거니와, 성진이와 인웅이 형은 처음 보는 사이였다.
그냥 가고 싶어서 하는 말이겠거니 싶어, 알겠다고 대충 대답 후 아침식사를 마치고 성진이와 작별 인사를 한 뒤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은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던 일 중 하나였는데, 지금 아니면 못 할 것 같다는 인웅이 형의 진심에, 이렇게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타이밍 좋게 만나게 된 것도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운명의 주인공인 인웅이 형은 확실히 여행 중 겪는 고난을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이 되어 줬다.
세명의 청춘이 2주도 채 남지 않은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아직 아침을 맞지 않은 어둑한 새벽 집을 나섰다. 고요한 거리에는 달달거리는 캐리어의 바퀴 소리만 떠다녔다. 집 앞 지하철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그래서 거대한 28인치짜리 캐리어를 들고 낑낑거리며 지하철역의 계단을 내려갔다. 20년 넘게 지하철역을 다니며 엘리베이터는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주제에, 오늘은 왠지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역이 원망스러웠다. 아마 20년 만에 필요에 의해 자기를 찾아주는 엘리베이터도 서운하겠지.
해는 아직 뜨지도 않았는데 지하철역에는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로 발 디딜 틈이 하나 없었다. 자.. 잠깐, 나는 여행 가는 거지 출근하는 게 아니라고...! 게다가 이 곳은 종점이란 말이다; 종점에서부터 앉을자리가 없다니, 당분간 지나는 역의 대부분은 거주지역인데, 다음 역부터 타는 사람들에겐 앉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없었다. 물론 나에게도 편하게 앉아 갈 자리는 허락되지 않았다. 출근길의 사람들로 꽉꽉 들어찬 콩나물 지하철 속, 나의 소중한 캐리어는 다른 사람들의 민폐 덩어리로 전락했다. 최대한 민폐가 되지 않고자 지하철의 마지막 칸, 캐리어와 함께 껌딱지처럼 벽에 붙었다. 추운 겨울의 출근 지하철 안은, 열차의 흔들림에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자, 몸의 중심을 유지하는 데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사람들의 거친 호흡으로 가득 차 따뜻했다.
얼마 후 공항까지 배웅해주겠다는 착하고 귀엽고 아름다운 여자 친구 다운이를 만나기 위해 광나루 역에 잠시 내렸다. 더위를 벗어날 때 느끼는 시원한 해방감은 꼭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얼마 뒤 다운이가 피곤함에 눈이 반쯤 감겨 쫄래쫄래 뛰어왔다. 졸려서 눈은 반쯤 감긴 채로 실실 웃으면서 총총 뛰어오는 모습이 너무… 너무.. 귀여워라. 행여 내가 피곤할까 유산균이 가득한 요구르트까지 사 오는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 최고다. 23일간 보고 싶으면 어쩌냐며 가지 말라고 조르던 여자 친구를 두고 가자니 미안했다. 하지만 다녀올게, 안녕!!
지하철에서 잠시 내린 뒤, 고작 한 두 개의 지하철이 지나갔을 뿐인데, 다시 탑승한 지하철은 놀랍도록 한적했다. 하지만 출근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그 지옥 같은 지하철을 꼭 타야만 했겠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수다를 떨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공항에 도착했다. 배웅을 와준 다운이는 마치 자기가 여행을 가는 것 마냥 들뜬 기분에 방방 뛰었다. 미리 도착해 있었던 성진이와 성진이의 여자 친구와 만나 함께 출국 준비를 시작했다. 짐을 부치고, 환전, 비행기 티켓 교환을 한 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출국심사를 위해 줄을 섰다. 그리고 다운이와 작별인사를 한 뒤 성진이와 공항 검색대로 들어갔다.
공항까지 따라와 준 다운이와, 성진이의 여자 친구에게 너무 고맙다. 덕분에 성진이와 내가 좀 더 편하게 출국을 준비할 수 있었다. 고마워 다운아! 그리고 성진이 여자 친구도!
다운이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뒤로한 채 나는 면세점으로 향하는 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다.
명품이 가득한 면세점의 유혹을 지나 항공기 게이트에 도착했다. 딱 맞춰 온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항공기에 탑승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오랜만에 타는 비행기에 긴장한 탓인지 배가 살살 아파왔다.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성진이에게 짐을 맡기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집중해서 화장실을 이용하는 타입이라 예상 성공 시간은 10분, 깔끔하게 출발 5분 전 탑승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화장실에 들어온지 5분이 채 되지 않아, 빨리 입장해 달라고 한다는 성진이의 다급한 재촉과 함께 화장실 문이 흔들렸다. 행여 화장실 문이 열릴까 황급히 이용을 마치고 뛰어나와 비행기에 탑승했다. 금방 출발할 듯 “빨리빨리”를 재촉하던 항공기는 지각 손님에 의해 15분이나 지나서야 출발했다. 좌석의 통로를 지나는 두 명의 한국인 지각 손님은 ‘빨리빨리’를 지향하는 자국 여행객들의 따가운 눈초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빨리빨리’는 언젠가부터 한국인이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비행기는 이륙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절반 이상 뻗어 있는 아름다운 백두대간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백두대간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일본 여행을 처음 할 때였다. 이른 아침 출발에 세명의 친구들과 함께 공항에서 밤을 지새웠었다. 그리고 나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잠에 들었다. 일본까지의 비행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금방 도착하는 정도? 그렇게 잠에서 깬 나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아름다운 산맥에 감탄했다. 그리고 서는 “이야, 역시 일본 산맥 진짜 장난 아니다~ 여기가 ” 하며 이것 좀 보라며 친구를 툭툭 건드렸다. 옆에 있던 친구는 눈을 말똥말똥 거리며 말했다. “아직 한국이야... 혁구야”. 동시에 편안한 비행의 시작을 위한 기장님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하하, 역시 아름다운 우리 강산 백두대간이 최고다. 행여 누가 나의 이 민망하고 비애국적인 발언을 들었으랴, 부랴부랴 눈을 감고 꿈속으로 도망쳤다.
어우, 2시간 45분의 짧은 비행이었지만, 내 허리를 고문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어우 뻐근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