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까지는 아니더라도 친근한 관계맺음을 위하여
- ㅇㅇ의 근무 종료일이 며칠 남지 않아 환송회 겸 이번 주 금요일 저녁을 함께 할까 합니다.
사무실 단체 대화방에 회식 공지가 올라왔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조교의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회사 측에서는 1년 더 연장을 하기를 바랐지만 본인이 하고 있던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하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가는 사람은 열렬히 응원해 주고 오는 사람은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일 터. 그런데 왜 하필 금요일인 것이며 저녁이란 말이냐고. 참석한다는 답장이 이어지는 가운데 모두가 궁금해할 질문을 꺼냈다. '메뉴는 무엇인가요?' 방어를 먹을까 한다는 팀장님의 답변에 그럼 참석! 제주의 겨울은 방어의 계절이니까.
회처럼 한상으로 차려지는 곳은 아무도 무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회식 메뉴로 부담이 없다. 이를테면 집게와 가위를 들고 고기를 굽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선배가 고기를 굽고 있는데 신입 사원 어느 누구도 거드는 사람이 없고, 한 입 드셔보시라 쌈을 싸서 주는 이도 없더라며 하소연하는 중견직원의 인터뷰를 담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고 일은 돈 받는 만큼 하는 거라는 논리를 대입해 본다면 돈을 많이 받는 윗사람이 고기도 굽는 것이 타당하겠으나 회사에 이런 반듯한 논리를 대입하려 했다가는 머지않아 반드시 내 자리가 사라질 게 뻔하다.
고기를 굽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왜 서로 눈치만 보는 걸까? 연기로 가득 찬 공간과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못마땅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하게 스며들 냄새 걱정에 죄 없는 고기를 쏘아보느라 고기 구울 생각은 미처 못하는 걸까? 애초에 고기가 문제가 아니라 회식 자체가 싫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각자 원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까. 갑작스럽게 성사된 회식인 경우 저는 오늘 선약이 있습니다, 하고 그 누구보다 빨리, 먼저 손을 든다면 회식에서 열외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일주일 전부터 일정을 예고하며 시간을 비우라는 공지사항이 내려왔다면 선뜻 아니요,라고 답하기 어렵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자기 최면이다. 그래, 이왕 이리된 거 남의 돈으로 맛있게 먹자!
내가 참석한 가장 최근 회식은 지난 연말 어느 저녁이었는데 장소를 정할 때 직원들이 고기를 구워주는 식당으로 예약을 했다. 다른 곳보다 가격이 조금 비쌌지만 누구는 고기를 굽기만 하고 누구는 먹기만 하는 불합리는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뒤집을 때이다, 아니다 좀 더 있어야 한다는 분분한 의견 대립 없이 전문가들의 노련한 손길에 맡긴 뒤 그들이 구워주는 대로, 또 알려주는 대로(어떤 부위는 명란 소스에 찍어서, 또 어떤 부위는 히말라얀 핑크 소금에 찍어서) 먹기만 하면 되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한결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회를 먹으러 간다고 하니 메뉴 선택이 탁월하다. 마음 같아서는 회식 장소로 호텔 뷔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지만 우리 회사 업무추진비 기준액은 1인 3만 원이다. 언감생신, 그림의 떡은 이럴 때 쓰는 말이렸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회식은(물론 굳이, 회식을 해야 한다면 말이다) 점심이다. 저녁 회식은 시간적으로 쫓기지 않아 여유가 있어 좋은 반면 이런저런 시답잖은 화제들로 대화가 늘어지기 쉽다. 하지만 점심 회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단 1시간. 짧고 굵게 먹는 데 집중하다 보면 1시간은 금방 간다. 점심 회식의 경우 초밥이나 샤부샤부를 먹으러 가는 경우가 많은데 김치찌개나 백반보다 격식이 있으면서 고기나 회보다는 가볍게 먹을 수 있다. 지리나, 전복돌솥밥, 한정식도 좋다. 미리 예약만 하면 시간에 맞춰 맛스러운 식사가 차려지기 때문에 이동 후 먹기만 하면 끝이다. 회식이 아니라도 회사에서 점심은 먹어야 하니까 회삿돈으로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으면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식구는 한 집에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집은 아니지만 회사에서도 거의 매일 점심 한 끼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동료들이다. 밥이 주는 힘은 크다. 내 안의 에너지를 채워주는 역할도 하지만 같이 먹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밥알들처럼 끈끈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요즘 임신당뇨 관리 때문에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싸가서 먹고 있다. 혼자 먹는 점심이 좋기도 하지만 점심계를 같이 하지 못해서 다른 동료들에게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점심을 같이 먹으면 이런저런 어려움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점도 아쉽다. 1월에 발령받은 신규 직원은 적응이 좀 되어가는지, 나처럼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있는 동료는 곧 다가올 봄방학을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근황을 알기 어렵다. 밥에서 멀어지니 사람에게서도 멀어졌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듯이 회사에서도 혼자서는 일할 수 없다. 내가 도움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수없이 반복된다. 동료들과 친밀한 관계까지는 아니어도 친근한 관계를 맺고 지내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밥을 같이 먹는 행동은 관계의 거리에 영향을 준다. 쌓이는 밥공기만큼 정도 쌓인다, 이른바 밥정. 밥정을 나누자고 매일의 점심을 동료들과 먹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상사를 모시기 위해, 인맥을 쌓기 위해 그들과 밥을 먹어야 한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부서 회식이 있을 때만이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참석해서 마음을 보태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사실 팀장님이나 과장님도 회식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고 한다.) 그들은 '부서 화합'이라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까지고 선약을 핑계로 회식에 불참할 수는 없다. 피할 수 없다면 한 끼 맛있게 먹는 것으로 불편한 속내를 달래 보면 어떨까? 회식은 싫어도 방어는 좋으니까. 영 내키지 않는 회식이라면 사람에게 기대는 것도 좋다. 한 사람을 떠나보내는데 혹은 맞이하는데 따뜻한 밥 한 끼 나눌 다정함이 우리에게는 있으니까.